우울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는 정도였던 것이 점점 무기력에 빠지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눈앞에 쓰레기가 있어도 그걸 바로 옆에 있는 휴지통에 넣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빨래나 설거지처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최소화했다.
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도 그대로 두었고, 음식물 쓰레기도 날파리가 날아다니면 보다 못해 치웠다.
직장에 다녔기에 머리도 감고 샤워도 했지, 만일 전업주부였더라면 며칠 동안 씻지도 않았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남편의 도박중독을 버텼던 것은 달라질 수 있는 희망 하나 때문이었는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니 절망스러웠다.
교수가 라디오 상담에서 처방해준대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가족 상담센터 연락처를 검색했다.
사무실에서는 통화가 편하지 않아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전화받는 상담원은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나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었다.
담당자가 아닌데도 친절하게 상담에 임해주니 나도 모르게 넋두리하듯 이어갔다.
남편과 함께 치료를 받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불가능하다면 나 혼자라도 받으라고 했다.
특히 중독의 문제는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동거하는 자녀가 있다면 함께 받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딸에게 묻지 않았으나 설득은 나중 문제니 우선 둘이 함께 상담을 받아보겠다고 했다.
한 명당 상담 횟수는 6회까지만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두 명이 함께 상담을 받을 경우 총 10회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나처럼 힘든 사람이 많은지 예약일은 두 달 후로 잡혔다.
상담을 받는다고 해도 상황이 짠! 하고 달라지는 게 아닌데 그게 또 하나의 희망이 됐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귀찮고,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지치는데 두 달을 어떻게 기다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여전히 나는 시간만 나면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휴대폰도 별로 재미가 없어서 잠을 자거나 멍하니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은 하루 종일 들었지만 뭘 어떻게 해보는 것 자체가 힘드니 눕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풀어진 달걀처럼 처진 내 모습을 보며 딸은 모든 게 아빠 탓이라고 남편을 미워했다.
평소에 남편과 딸은 별로 대화하지 않았기에 남편을 미워하는 것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딸의 말투나 표정에서 아빠를 경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남편과 나의 사이가 안 좋더라도 아이들은 남편과 잘 지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내가 좌우하는데 이러고 있으니 죽도 밥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억지로라도 기운을 차려야만 했다.
회사 옆 병원건물에 5층에 정신과가 있다는 것은 이곳으로 이사 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른 과는 몰라도 정신과 간판은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온다.
내과나 안과처럼 흔하지 않기도 하고, 정신과에 몇 번 다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근해서 병원에 전화했다.
초진예약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대기일이 길었다.
주말 진료는 두어 달을 기다려야 하고 2주 후 평일 낮에 가능한 시간을 알려줬다.
예약에 내 의견은 없다.
일방적으로 안내받은 날짜에 올수 있으면 오고 아니면 말라는 식이었다.
급하고 아쉬운건 나니까 연차 낼 요량으로 진료예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