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대모산 자락길
이번엔 강남구 일원동. 정갈하게 차린 한상을 배불리 먹었으니 소화도 시킬 겸 걸을 만한 곳을 찾았다. 로봇고등학교 방향으로 걸어갔다. 야트막하고 가뿐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고 하니 산 쪽으로. 어디선가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반가웠다. 숲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의 소리는 커지고 있었다. 얼음판에서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숲 속에 퍼지고 있었다. 그곳이 숲속야생화원이라고 했는데 꽃과 풀이 자라나면 자연학습장 구실을 톡톡히 하게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이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즐길거리를 찾아 신나게 논다. 한겨울 숲, 아이들이 꽃이다.
길을 따라 올라간 곳이 대모산 자락길 2구간이라고 표지판이 알려준다. 이 길로 들어선 김에 불국사까지 가보기로 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도 불국사가 있었다니! 놀라면서 쭉 따라 걸어갔다. 눈이 내린 지 한참 지났는데도 잔설이 남아있고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은 꽁꽁 얼어있었다. 겨울만이 지어낼 수 있는 표정이다.
서울에도 불국사가 있었다.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절마당에 시선을 가리는 비닐하우스가 있었고 여느 사찰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해우소를 찾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드나드는 불자도 없었다. 그래도 절에 왔으면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게 기본예절이라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약사보전에 들어갔다. 동그란 단지를 들고 있는 부처님이 질병뿐만 아니라 모든 어려움을 없애주시리라 믿고.
절마당으로 계단을 오를 때는 몰랐는데 절에서 내려오다 보니 123층의 롯데타워가 정면에 보였다. 극적인 대비가 아닌가. 산과 도심, 절과 속세, 고요와 번잡스러움, 새소리와 차소리.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 대웅전이 아닌 약사보전에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려 후기의 석불로 추정된다고 적혀있다.
우연히 눈에 띈 그루터기, 죽어서는 쓰레기통이 되어주었다. 4억만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생명체. 나무는 식량, 약품, 목재, 세 가지로 분류되어 우리 삶과 인연을 맺어왔다더니. 죽어서도 질긴 속세의 인연이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한겨울에도 늘 푸른 나무가 있어서 좋다. 남천도 그렇다. 한겨울에도 붉은 열매를 달고 있어서 지난 성탄절을 떠올리게 한다. 흰 말채나무 가지도 그렇다. 봄에 피는 꽃과 열매는 하얘서 '흰'이 들어갔는데 가지는 여름에는 청색이었다가 겨울이 될수록 붉어진다는 게 신비할 따름이다.
벤치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며 숲멍을 하면 좋으련만, 먼지만 자욱한 의자에는 앉은 흔적도 없고 나도 앉은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수풀과 덩굴이 우거지면 그럴 마음이 생기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겨울을 꿋꿋하게 나고 있는 사철 푸른 나무를 위안 삼아 걸을 뿐이다. 겨울이 빚어내는 겨울다운 풍경도 위안이 된다. 빈 가지 사이로 새들의 집들도 보이고 대모산 정상으로 오가는 등산객들의 모습도 그대로 드러나 깊은 산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식의 착각,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