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고은산 고은정
엊그제는 날이 푹했다. 연세대 북문 쪽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데 안산이 보이자, 우리는 언제 갔었던가를 더듬어보게 되었다. 봉수대까지 가본 것이 한라산 백록담에 갔던 것만큼이나 자랑스러웠는데 언제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한참을 더듬어야 했다.
밥 먹고 안산끝자락에 자리 잡은 서대문 도서관부터 가보기로 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좁았는데 주차되어 있는 차와 그것을 피해 출입하는 차들로 길이 꽉 찼다. 도서관과 학교가 같은 길로 드나들게 되어 있었으니 복잡한 게 당연해 보였지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면에서)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도서관은 겉에서도 짐작은 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오래된 게 더욱 실감 났다. 바닥이며 벽이며 서가 모두 신생 도서관과는 많이 달랐다. 손때 묻은 것이 주는 편안함도 있지만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야외책방 [책뜰]은 잠시라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안구정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신연중학교의 초록색 네모난 운동장이 내려다보이고 완만한 백련산은 수평으로 보였다.
서대문도서관 건너편 아파트 뒤쪽에 있는 산이 고은산이라고 했다. 이름 참 예쁘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고운 이름이 지어진 걸까. 안산과 백련산 사이에 끼어 존재감이 없는 듯하지만 이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고은산 초등학교 뒤 고은산 놀이터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아이들이 여럿 모여서 놀고 있었다. 뛰노는 아이들이 예쁘다. 가파른 산동네에 이런 곳이 있다니. 놀이터 흙은 눈이 녹아 질척거렸는데 가장자리 땅이 마른 곳은 동네 어르신이 연신 비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흙에 박힌 은행들을 바깥쪽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놀이터 주변을 은행나무가 빙 둘러 서 있는 게 아닌가. 가을, 은행나무 물들면 장관이겠구나.
이 동네는 정말 높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북한산과 맞먹는 것 같다. 이렇게 높은 곳에 다닥다닥 집들이 지어진 것도 여기서 사는 것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새마을'이라는 문구와 깃발을 단 건물은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드라마 셑트장을 연상시키기까지 했다.
산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잠깐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가 그대로 산책할만한 곳, 가까운 거리에 정자가 있었다. 고은산에 있는 정자니까 [고은정]인 것이겠지. 여기서 바라보는 세모 모양의 안산과 일직선의 백련산이 시원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여기 야경 끝내주겠다, 여름엔 시원하겠다, 개나리가 피면 참 예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고은정에 앉아있던 그 순간, 최고였다.
아직 눈이 덜 녹아 마른버짐처럼 군데군데 하얀 곳이 눈에 띄었지만 고은정 지나 걸었던 평평한 길은 양지 발라 괜찮았다. 봄날 산행은 질척거림을 각오해야 하지만 고은산에서 내 신발은 계속 깨끗할 수 있었다.
계절이 절기에 꼭 들어맞게 오는 것은 아니지만 도가 지나치다. 어제가 입춘이었는데 '7년 만에 가장 추운 입춘 한파'가 밀려왔다. 한파특보가 내려져도 봄은 움트고 있음을 알고 직접 보았으니 봄이 오고 있다는 증거를 사진에 담아왔다. 그 확실함과 당연함이 '기꺼이' 참고 기다릴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
봄날은 온다. 올 것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도 곧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