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공해를 피해 한적한 곳으로
기지개를 켜는 시간, 아직 어둡다. 방안은 고요했다가 이제 막 환해졌는데 집 밖은 밤새 차들이 빛을 뿜어내며 생생 달렸을 것이다. 창쪽이 아닌 안쪽 방에 들어앉았어도 밖의 소리는 크게 들린다. 잠들지 않는 소리는 소음일 뿐이다. 여기서는 전에 살던 곳에서 들었던 새들의 노랫소리나 바람에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일 년만 잠시 살 집이라서 편하게 역세권 오피스텔에 들어온 건데, 소음공해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한 것을 고려사항에 넣지 못한 데다 방음이 잘 되어 있을 거라고 "내식대로' 착각한 것이다. 소음을 이겨낼 힘이 없는 나는 영락없는 피해자다. 블루투스로 음악볼륨을 크게 해 봐도 도심의 소음은 강력한 배경으로 깔리고 만다. 나는 나에게 '역세권 적응불가'라는 판정을 내렸다. 교통이 좋은 대가가 소리에 민감한 내게는 가혹하다. 여기서 더 이상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게 될 날, 계약만기가 곧 돌아온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시간이 해결해주고 있다.
쉬는 날, 가급적 밖으로 나무들이 사는 곳으로 나가고 있다. 한적한 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나면 살 것 같아져,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비축하러 가는 것이다.
언제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무들이 제 멋대로 사는 것 같아도 자기들만의 독특한 성장곡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무마다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같은 종이라고 해도 죄다 다르지 않던가. 사람이 비슷한 것 같아도 다 다르듯이. 군락을 이루면 한 덩어리로 보여도 하나씩 뜯어보면 다르고 그 다름이 신기한 것처럼.
걷는 것도 그렇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바람이 다르고 햇살이 다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다름으로 해서 매번 새롭다. 그런 새로움이 활기를 불어다 주고 필요했던 온기와 위로를 덤으로 가져다준다. 과분할 정도로 걷는 것이 주는 힘은 크다. 고마운 일이다. 걷다가 마주친 남의 집 담벼락. 뒤틀린 나뭇가지와 바늘모양의 잎이 만들어낸 그림자. 이 작품의 작가는 해님이다.
바람이 거칠었다. 찬 기운을 피해 카페로 들어갔다. 무작정 걸을 때는 몰라도 뜨아가 들어가는 순간 몸이 얼어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커피 향에 졸음이 밀려온다. 유리창을 밀고 들어오는 햇살 때문이기도 하다. 얼빠진 채로 멍 때리며 있다가 깜빡 졸아도 괜찮을 듯하다. 여유 있는 공간이 주는 느긋함, 느슨함을 만끽하는 순간 행복하다.
이렇게 커다란 목련 나무는 처음. 큰 것에 한번 놀랐고 나무연꽃 끝에 셀 수 없는 겨울눈이 달려있어서 또 놀랐다. 자세히 보면 뽀송뽀송한 털을 덮고 있고 모양은 붓 같다. 손을 있는 대로 뻗어도 닿지 않아 잘린 나뭇가지로 높은 가지를 끌어내려 만져보니 겨울눈이 부들부들하다. 유난히 손끝이 시린 날, 목련도 가지 끝이 시려 끄트머리에 털옷을 겹겹이 껴입고 겨울을 나는 것이겠지. 나무가 겨울을 나는 지혜가 돋보인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나무 가까이 가면 마음은 금방 가벼워지고 따스해진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서 설명하기는 힘들다.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감각으로 알고 몸이 알면 증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 걸어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서부터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까지 느낄 수 있다. 일기예보대로라면 날이 풀릴 것이다. 아무 때나 잠깐, 무작정 걸어보자.
"직립보행하는 이 몸은 진화의 수억 년을 통과해 나온 몸이지만, 아직도 네 발의 추억을 간직한 몸이다. 당신들 발바닥의 굳은살 속에 그 추억은 살아있다. 그 몸이 걸어갈 때, 걸어가는 몸의 속도, 시선의 위치와 방향, 팔다리의 동작은 몸의 기능과 위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걷기는 시원적이고 인류학적이다." 김훈 <허송세월> 132쪽 걷기 예찬에 나오는 공감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