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서대문구를 쏘댕겼다. 오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는 날이라 느긋하게 실컷 걸을 수 있었다. 남편한테 같이 가자고 했더니 흔쾌히 따라나선다. 맛있는 것을 사주면, 하는 토를 달았는데 나도 나가서 사 먹는 것은 좋다. 내가 하지 않은 밥은 무조건 OK. 나도 OK 그이도 OK!
우리가 찾아간 곳은 계단 없이 평평한 데크로만 조성된 둘레길이었는데 걷는 게 좀 불편한 사람도 너끈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다. 큰길에서 멀찍이 홍지문이 보였고 내부순환로 아래쪽으로는 홍제천이 흐르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었다. 보관을 쓰고 감긴듯한 눈매와 호분이 칠해져 마치 옅은 화장을 한 여인네처럼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백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바위자체는 10m이고 마애불의 높이는 그 절반인 5m의 높이.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불상 앞에서 어쩔수 없이 합장만 한다. 공양하고 절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예를 갖추고 우리는 데크 쪽으로 이동했다.
작년 가을 이곳에서 수변 음악회가 열렸다는데,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내부순환로의 소음을 덮어버리는 음악은 이곳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것은 누구나 드는 생각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북한산 자락길로 들어섰는데 안내판을 보인다. 서대문구에서 이름을 붙인 서대문이음길은 서대문을 산(안산-인왕산-백련산-궁동산)따라 크게 한 바퀴 도는 코스로 총 20.9km에 달한다고 한다.
서대문 이음길 3코스 시작점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서기 전 이곳의 풍광은 매우 빼어났을 것 같다. 북한산과 인왕산이 마주보는 사이로 옥같이 맑은 물이 흘렀을 테니까. 머리속으로 도로와 아파트를 걷어낸 모습을 떠올려보았는데 아주 멋진 풍경이 그려진다.
내부순환로뒤로 인왕산이 빼꼼
이 길은 계단이 단 1개도 없는 무장애숲길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걷다 보니 개나리가 많았는데 봄이면 얼마나 이쁠지 상상해서 그려본다.
겨울은 겨울대로 괜찮다.
북한산자락길 따라
숨이 죽어버린 것만 같은 겨울날, 천천히 걸으니 숨죽이고 있는 자연이 다가온다. 1년에 한 번씩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서있는 나무. 다시 싹을 틔우고 키워낼 자신이나 확신이 없다면 버리는 일이 불가능했겠지. 아직도 나무에 붙어있어 바삭바삭해진 이파리들은 바람에 부대끼고 말라붙은 열매들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빈 가지 사이로 말벌집이
쩍쩍 갈라지고 뚝뚝 부러지고
토끼풀을 닮은 천일홍 드라이플라워
배고픈 건 못 참아 '포방터 시장' 팻말을 보고 고픈 배를 채우러 마을로 내려왔다. 아쉬웠지만 이름도 특이하고 [골목식당]에 나온 적도 있다는 포방터 시장, 괜찮겠다 싶었다. 그리고 홍제천도 있으니, 주변에 가서 볼 데는 널려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도성을 지키기 위해 포 훈련을 했던 곳이고 한국전쟁때 서울을 방어했던 곳이라고 한다.
시장에서 홍제천으로 이어지는 길
혈당스파이크를 막기 위해 밥 먹고 걷는 것은 당연지사가 되었다. 걷는 즐거움은 이때 몇 배나 증폭되는데 배가 든든하면 몸도 따뜻해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먹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게 나이 먹을수록 몸이 달라지는 것만큼이나 실감난다.
홍제천 따라 걸으니 원위치되었다.
옥천암이 보인다
한참 걸었지만 가파른 오르막이나 내리막 길이 없어서 힘든 줄 몰랐다. 삶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가로젓는다. 그렇다면 오르막길에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힘을 내면 되고 내리막길에서는 살금살금 조심해서 내딛으면 될 것. 주어진 길에 맞게끔 내가 맞춰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이한테 맞춰살고 그이가 나를 견디며 살아온 것처럼. 그런 각오로 길을 따라 걸으면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