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않은 편지 9
오빠, 오랜만이야. 오빠가 있는 저승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승은 늘 복잡다단하고 요란스러워. 요즘 날씨도 그래. 어제만 해도 내가 있던 곳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친구가 있는 곳은 물폭탄이 떨어졌다더라고. 같은 서울인데 놀랍지. 날이 갈수록 세상엔 '전에 경험한 적이 없던'낯섦과 극단이 늘어나는 것 같아. 장마가 자취를 감추고 짧은 시간 좁은 지역에 시간당 100mm의 비가 쏟아질 때도 있어. 재난급이지. 나는 날이 습하게 더워 가급적 새벽에 걸으려고 미사 드리러 갈 때는 일부러 새벽에 갔다 걸어오곤 해.
한 달 전 오빠 기일에 새벽미사 갔다가 성당에서 오빠 대부님을 만났어. 연미사드리러 오셨더라고.
- 시몬대부님! 어떻게 오셨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황반변성 치료받으시는 건 좀 어떠세요, 지난번 안대하고 계셔서 저를 못 알아보시길래 살짝 놀랬어요.
- 아, 뭐... 덕분에 좋아졌어요. 나이 들어 그런 건데 어쩌겠어요, 이만하길 다행이죠.
- 오빠 간지도 15년인데. 얼굴 한번 못 본 대자를 기억해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사실 오빠 대부님은 훈이 대부님이기도 해. 오빠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임종대세 때 대부가 되어달라고 긴급요청을 드렸더랬어. 오빠의 세례명은 요한이라고 정했고 대부님 세례명은 시몬이야. 그분은 20년 전 우리가 산아래 빌라에 살 때 옆집에 사셨었어. 그 인연으로 훈이 중학생 때 견진대부를 서 주셨던 거야. 당시 나는 기껏해야 주일미사만 잠깐 갔다 오면 끝이었는데 시몬대부님 부부는 성당에서 책임이 중한 봉사를 맡아하셨어. 천주교나 성당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고 그런 데다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라 우리 애한테 관심 써주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았지. 훈이가 관심받고 돋보이고 싶어 하는 성향이라서 신부님 옆에서 시중드는 복사를 서고 열심히 주일학교 다니니 더 이뻐하셨던 것 같아.
나는 시몬 대부님이 훈이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물어오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데 이번에도 아니었어. 대부님쪽에서 물어오면 뭐라도, 아예 터놓고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거든. 사실을 알든 모르든 기도를 해주실 분이시란 걸 잘 알고 있지만, 기도가 절실하다고 알리고 싶었어.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대자 엄마인 나를 연결끈으로 잡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훈이와 연락이 끊겼는데도 굳이 나한테 그것도 주기적으로 톡을 하시겠어.
대부와 대자의 연락이 끊긴 게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짐작 가는 게 있긴 해. 내가 훈이 도박문제를 알고 오래지 않은 어느 날 오후, 시몬대부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어. 보통 근무 중에 전화를 받지 않는데 전에 없던 일이라 전화를 받았지.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훈이한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거야.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훈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사고를 당해 급히 수술비가 필요하다면서 500만 원을 빌려달랬다는 거야. 대부님이 훈이한테 일단 기다려보라고 하고 나한테 연락을 주신 거였어. 대부님, 돈 주지 않고 저한테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한테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랬었어.
그날 이후 그 건에 대해 서로 한마디도 오간 적이 없어. 그 일로 대부님이 무슨 생각이셨는지 모르지만 주기적으로 안부문자를 날리던 대자가 뜸하다고 하시더니 차츰 안부조차 묻지 않으시더라고.
오빠, 시몬대부님을 뵙고 생각이 많아져 천변 따라 한참 걷다 돌아왔어.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는데 굳이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이제 연로하셔서 눈에 띄게 건강이 악화되는데 거기다 대고 말하기는 어려워져. 한편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실체에 가깝게 알고 계실지 모르기 때문이야. 성당사람들 입이 좀 가벼워, 온갖 소문이 다 퍼졌을 거고 시몬대부님 귀에까지 전달되었을 거야. 내가 마음 아파할까 봐 건들지 않는 것일지도 몰라. 넘겨짚긴 싫은데 그럴 확률이 높아. 그저 기도해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같이 해주시는 거니까.
걸었어. 걸으니까 생각들이 걷히고 마음이 편안해졌어. 생각도 바람에 날아가고 흩어질 것이라 붙잡지 않으면 되는데. 눈감으면 다 날아가고 흩어져 끝나는데, 사는 게 쉽지 않아. 편지를 쓰면서 가늠할 수 없는 편지 너머의 세상을 그려보곤 해. 저승은 가보지 않아 모르고 이승은 살아내기 바빠 실체를 모르겠는데도. 어쩌면 난 아직 끝내지 않은 숙제가 남아서 이승에 있는 건지도 모르지. 한 치 앞을 모르면서 이런 말은 하는 내가 우습네. 아무튼 지금 당장 살아가야 하는 삶이 펼쳐져 있으니 살아내야지. 힘낼게, 오빠.
편지가 길어졌지. 그만 쓸게.
잘 있어,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