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는 겨울 아침의 즐거운 열매들
창밖을 내려다보니 눈이 오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에 처음으로 내리는 눈은 나무에도 땅에도 쌓여가며 세상을 하얗게 만들고 있군요. 반가운 마음에 눈을 맞고 있을 열매들을 보러 가기로 합니다.
하얀 눈은 낙상홍의 마른 가지에도 쌓이고 붉은 열매에도 내려앉습니다. 눈이 내리는 이 겨울까지 씩씩하게 남아 하얀 눈을 맞고 있는 빨간 열매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그런데 붉은 열매에 닿은 눈은 그녀의 정열 때문인지 살짝 녹아가기도 하네요. 어느 빨간 낙상홍의 열매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습니다. 왠지 하얀 고깔모자를 쓴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산타 클로스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합니다.
빨간 열매들에 내려앉는 눈이 마치 하얀 꽃 같습니다. 봄날의 꽃들이 분홍, 노랑, 빨강이라면, 겨울의 꽃은 흰색인 것일까요? 흰 눈을 맞고 있는 빨간 열매들이 왠지 활짝 웃는 듯도 합니다. 그녀들은 춥지도 않은가 보네요. 붉은 정열을 간직한 그녀들이 하얀 눈을 감싸 안는 모습이 그대로 소담스러운 풍경이 됩니다.
흰 눈은 매자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도 쌓여갑니다. 여전히 붉은 모습으로 단단하게 익어있는 열매에도 쌓이고요. 아직 남아있는 마른 잎들도 온통 눈을 뒤집에 쓰고 있습니다. 긴 가지를 따라 열려있는 붉은 열매들은 눈바람과 함께 어떤 겨울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빨간 음표에는 즐거운 울림이 가득 들어있고요.
이제 주름진 좀작살나무 열매도 눈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한 보랏빛 열매들은 쌓여가는 눈이 무겁지도 않은 듯 즐거운 표정이네요. 긴 가지에 늘어선 보라색 열매들은 긴 행렬을 보는 듯합니다. 하얀 모자를 쓴 꼬마 악단들이 멋진 행진곡을 연주하며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군요.
마른 가지마다 아직 많이 달려있는 보라색 열매들은 눈이 오니 더욱 신이 나는 듯합니다. 춤을 추며 내리는 눈발을 얼굴에 맞으며 나긋나긋한 몸짓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산책자도 즐거운 마음이 됩니다.
조금씩 내리는 눈발을 맞으며 천천히 걸어봅니다. 비록 날씨는 차갑지만 하얀 눈이 내리고 쌓여가는 겨울 아침의 산책길은 왠지 푸근한 느낌이네요. 그런데 하늘이 흐려서인지 아직 새벽 같기도 합니다. 잠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중 허밍 코러스(Coro a Bocca Chiusa)를 들어봅니다. 잔잔하게 울려오는 선율을 들으니 산책자의 마음은 따뜻해져 갑니다. 쌓여가는 눈을 밟은 발걸음은 더욱 느려집니다.
붉은 열매들이 가득 달려있는 남천의 가지는 눈과 함께 휘늘어졌네요. 자신의 무게에 더해진 눈의 무게 때문인지 나긋나긋한 움직임도 보여줍니다. 흰 눈이 쌓인 초록 잎 사이의 빨간 열매가 산뜻한 모습입니다. 그녀는 멋진 옷으로 단장하고 이제 흰색 털모자를 쓰고 외출을 하려는 듯합니다.
하얀 눈을 맞고 있는 배풍등의 통통한 볼이 더욱 빨개졌네요. 뭔가 한겨울 아침에 붉은빛을 발하는 전구를 보는 듯합니다. 그녀는 가는 줄기에도 빨간 열매에도 온통 눈을 뒤집에 쓰고 있네요. 왠지 모자도 씌워주고 장갑도 건네주고 싶어 집니다. 아직 초록빛이 남아있는 잎새에도 하얀 눈이 쌓여있습니다. 붉은 등 같은 작은 열매들과 함께 어떤 겨울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왠지 밤이 되어도 밝게 빛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빨간 야광나무 열매에도 흰 눈이 쌓여가네요. 여전히 반짝이는 붉은 열매에서는 어떤 울림도 느껴지고 방울소리가 나는 듯도 합니다. 그녀들은 언제나 즐거운 듯하네요. 뭔가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들여오는 듯도 합니다. 아주 작은 아그배나무 열매는 자신의 몇 배가 되는 많은 눈을 맞고 있네요. 검붉어지고 검게 말라버리는 열매들은 점점 깊어가는 겨울 속으로 잠기어 갑니다.
뜨거운 커피잔을 어루만지며 굳은 손을 녹여봅니다. 얼굴도 시리도 손도 차가워졌지만 왠지 마음만은 훈훈하고 흐뭇해지는 느낌입니다. 글린카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을 들어봅니다. 오케스트라의 힘찬 연주가 마치 찬바람과 함께 흰 눈이 휘날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흰 눈 속의 빨간 열매들을 생각해보니 뭔가 뜨거운 느낌도 다가옵니다. 이제 몸도 마음도 점점 따뜻해지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