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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타초이 Jul 02. 2022

1 하필 백수였다

[신비의 도로의 신비]

“3일만 좀 부탁해. 이 정도면 되니까, 응?”

엄마는 제주도 물부엌을 개조한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오른손엔 반쯤 남은 핑크색 캐츠랑 20kg 포대가, 왼손엔 사료로 가득 찬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이 들려있었다. 깊은숨을 내몰았고 명치가 부풀어 올랐다 내려앉았다. 장탄식을 들었을 테지만 엄만 모르는 척 곁을 지나친다. 미간에 옅은 주름이 지고 입꼬리가 내려갔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갈비뼈 깊숙한 곳이 묵직해졌다.


“생각나면.”

엄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생각이 나면 밥을 챙겨주겠지만 노느라 까먹으면 어쩔 수 없다,를 네 글자로 줄여서. 그 정도만 책임지고 싶었다. 스스로에게도 그만큼만 책임지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 막 제주의 습도에 적응하려던 참이었다. 지난한 회사 생활도 막을 내렸다. 매달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미래를 천천히 설계만 하면 되었다. 이 꿀 같은 환경을 만드느라 얼마나 참았던가. 고생했던 과거의 나를 위해 미래를 운용하고 싶었다.


“알겠어, 생각나면.”

내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엄마의 입꼬리에 미소가 스쳤다. 젠장, 당했다.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보다 동물을 가엽게 여기며 과한 책임감을 내 것인 양 짊어지고 사는 인간이란 걸. 그러니까 동생이 아닌 내게 부탁했겠지. 고양이는 동생이랑 더 많이 보러 갔으면서. 내 주문은 효력이 없었고, 나는 늘 고양이에게 밥을 줘야 한다는 걸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었어, 이름.’

고백하듯 엄마가 말했다. 그 이름은 신비였다. 엄마는 그 고양이를 신비의 도로에서 만났으니까 신비가 적당한 것 같다고 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정확하게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좋네, 기억하기도 쉽고.”

“예쁘지?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너무 잘 지은 거 같아. 그지?”




2주 전, 엄마와 송이는 산책을 하다 우연히 한 고양이를 마주쳤다. 며칠 후 그 셋은 또 만났고, 엄마는 고양이의 집까지 쫓아갔다. 가보니 처음엔 쥐새낀 줄 알았다던 새끼들도 몇 마리 있었다. 이후 우리는 장을 볼 때마다 강아지 간식뿐 아니라 고양이 사료까지 사게 되었다. 매일 아침 출근 카드 찍듯 엄마는 송이와 함께 고양이에게 밥을 주러 나갔고, 그 고양이는 엄마에 의해 신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엄마는 신비의 도로에 사는 신비의 식사를 당부하고 육지로 갔다. 할머니랑 이모도 보고 병원도 다녀올 겸 기내용 캐리어를 빈틈없이 채워서 날아갔다. 기분 좋게 엄마를 배웅하지 못했다. 해가 꼭대기에 오르기 전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놀랍지도 않았다. 들은 대로 그란데 사이즈 종이컵에 사료를 가득 채웠다. 고양이 사료는 강아지 사료랑 다르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잠옷 위에 하얀색 셔츠 하나 걸치고 문을 나섰다. 9월 문턱에 들어선 제주는 따뜻했다. 멀리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드러났다. 가늘게 눈을 뜨면 하얀 파도 주름도 보였다. 미세먼지 좋음! 길을 건너 카페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방치된 지 한참은 돼 보이는 폐점포가 나타났다. 평소라면 그 옆에 ‘신비의 도로’라고 새겨진 커다란 비석에 시선을 두었을 텐데,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과거 어느 시점엔 관광객들에게 물이며 간식을 팔았을 법한 점포답게 현관문은 따로 없었다. 아마 예전에 옥수수도 팔았던 모양이다. 빨간 궁서체로 ‘옥수수’가 적혀있는 냉장고가 옆으로 뉘어있었다. 그 옆으론 예전에 쓰던 사무용 책상과 의자, 음료수 냉장고 같은 가구들이 테트리스처럼 쌓여있었다. 가게 양쪽으로 하반신만 겨우 가리는 여닫이문이 나 있었다. 문을 잠그는 고리가 있었지만 방범용은 아니었다. 제주 바람에 뜯기지 말라고 고정하는 용도에 더 가까워 보였다. 바로 여기가 신비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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