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는 인상파 화가인 고갱을 모티브로 지었다고 하는데, 인생의 베일은 서두에 단테의 신곡 중에서 연옥편의 제5곡 중 마지막 구절을 언급한다. 단테에게 나타난 망령 중 마지막인 피아가 단테에게 현세로 돌아가거든 자신을 기억해 달라 간청하는 내용이다.
인생의 베일이란 제목보다는 사랑의 베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인생의 베일이라고 읽으면서도 자꾸 사랑의 베일이라고 쓰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암시하는 바가 있다. 베일이란 머리와 얼굴을 가리거나 보호 또는 장식하기 위하여 쓰는, 가벼우면서 얇거나 반투명한 천을 말한다. 주인공인 키티의 베일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키티의 남편의 이름은 월터 페인이다. 페인이라면 고통, 통증이 아닌가. 또한, 키티는 새끼 고양이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백지 같은 철부지이다. 이름에 작가가 어떤 암시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묘하다. 동생보다 미모면에서 뛰어난 키티는 예상과는 다르게 나이가 차도록 결혼하지 못한다. 자꾸 동선이 겹치는 월터를 염두에 두고 먼저 약혼한 동생보다 먼저 결혼하고 싶은 욕망을 표출한다.
시쳇말로 츤데레 또는 뚝배기라고 할 월터는 인기가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키티가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빈 여자임을 알았음에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을 수도 있지만 그는 다만 그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나이와 동생의 약혼이란 주변 환경 때문에 키티는 사랑하지 않는 월터와 결혼한다.
만약, 키티가 월터의 헌신적인 사랑에 스며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월터 또한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사랑받지 못함의 하소연을 그때 그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뒤쫓는 걸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한 것일까. 비극은 서로 감정의 높이가 다른 시작부터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쪽은 너무 넘쳐흐르는 홍수 같고, 다른 한쪽은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이었으니. 메마른 논에 슬쩍슬쩍 분무기로 입술을 축이게 주었으면 어땠을까. 잔에 넘치게 따라 주어서 한 방울의 물의 귀중함을 의식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겉은 화려하고 사탕을 묻힌 입술을 가진 찰스가 작정하고 키티를 유혹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그의 베일에 속아 그 뒤의 바람둥이 기질을 간파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프레임에 갇히면 사랑에 속고 속이는 갑과 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남자는 남자가 더 잘 보는 법, 월터는 이미 찰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 이는 타이탄 푹의 워딩턴도 알아챌 정도이다. 찰스의 부인인 도로시도 아는 것을 겉모습에 속은 키티만 몰랐을 뿐.
사랑하는 키티의 부정을 알게 된 월터는 콜레라가 창궐한 타이탄푸로 굳이 자원하여 간다. 그는 이때 이미 스스로 암흑에 갇힌 것이 아닐까. 의사도 아닌 세균학자인 그가 꼭 가야 할 명분은 없었는데도 간 이유는 뭘까. 키티랑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일까. 새로운 곳에서 둘의 종착지를 향하기 위해서일까.
키티의 부정까진 참을 수 있었다. 스스로를 혹사시키면서 핼쑥해지고 옷을 헐렁해졌어도. 그러나, 부정의 씨앗인 뱃속의 아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실험실에서 스스로 죽음이란 영원한 안식처로 들어간 걸까. 나는 그토록 진중하고 무겁게 사려 깊은 남자가 부주의해서 콜레라에 감염됐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그가 스스로 순교를 자처한 것일 거라 짐작한다.
"소란 떨지 마요. 난 험한 길을 걸어왔지만, 이젠 괜찮아.'
"냄비 속에 갇힌 물고기 꼴이야"
"죽은 건 개였어."
불쌍한 월터는 외사랑이란 가시밭인 험한 길을 걸어왔지만 임종이 가까워지니 괜찮다. 사랑 속에 갇힌 물고기 꼴이었지만 그는 이제 안식을 얻었으리라. 죽은 건 개였고 그는 사랑의 순교자였다.
키티는 어리석었지만 타이탄 푹에서 대자연의 위대함과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하며 한층 성장한다. 찰스의 베일 속을 들여다보았고, 사랑의 베일도 벗겼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녀는 돌아온 홍콩에서 도로시의 초대를 마지못해 수락한다. 불구덩이인 줄 착각했던 찰스의 집에서 그가 미끼를 던진 그의 품에 다시 안긴다. 뭐였을까, 그때의 이 여자의 심리는.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찰스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떠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가슴도 슬퍼하지 않소.'
결국 키티는 고향의 아버지품으로 돌아온다. 고단한 아버지가 새로 지원한 근무지로 아버지의 그동안의 노고와 사랑에 보답하고자 따라가길 자청한다. 이제 한 여자로서 한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로 거듭난 것일까. 다시는 베일에 속지 않을 수 있을까. 말년의 아버지는 흐뭇할까, 땅을 치고 후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