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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증언

노동의 고단과 서정의 울림

by 은후

<어떤 회색>


http://www.ystoday.co.kr/news/415240

시계는 알고 있



질퍼덕거리는 골목길과

물 먹어 흐물흐물한 토담의 주범

폭우가 찾아오면

한 푼 아쉬운 일용직 쉬라 한다


매서운 칼바람이

대지의 목줄 감싸고 위협하는 한겨울

콘크리트도 무서워

벌벌 떨며 숨죽인다


회전근개 파열되고 족저근막염 도져도

온종일 머슴인 듯

일하니 골병드는 줄 아니 모른다


겁도 없이 재깍재깍

한결같은 네가 관리 감독했더라면

화정 붕괴는 있었을까

누가 안 볼 때는

잠시 허리 펴고 농땡이 부린대도

무어라 하는 이 있을 리 만무하다


우직하게 자리 지키고

똑딱똑딱 제 할 일만 하는

융통성 없고 대쪽 같지만 헌헌 대장부란다




[시작 노트 및 감상 포인트]



이 시의 주제는 노동자의 고된 삶과 그 곁에서 이를 무심히 기록해 가는 시간의 대비에 있다. 화자는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소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회전근개 찢기고 족저근막 뒤틀려도 온종일 머슴처럼”이라는 구절로 노동이 몸을 파괴해 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의 처지가 얼마나 손쉽게 소홀히 여겨지는지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장치이다.



반대로 “재깍재깍”, “똑딱똑딱”의 반복은 시간의 무심한 일관성을 상징한다. 시계는 인간의 고통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흘러간다. 이 속성은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실존적 무상함, 그리고 사회적 구조의 냉혹함을 상징한다.



프롬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소유(having)의 굴레(일용직, 신체의 소모)에 묶이지만, 시계는 흘러감 자체로서 존재(being)의 차원을 드러낸다. 이는 인간의 고난을 초월하는 시간의 성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계에 대쪽 같은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역설적 ‘따뜻함’이 느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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