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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Sep 18. 2022

너희에겐 시험 시간, 나에겐 데이트 시간

태국 고등학교의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되었어요.

1.

“다음 시간에는 무엇을 한다고요?”

“시험이요!”

학생들은 대답하는 건지 괴성을 지르는 건지 모를 비명과 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생이라면 시험은 가장 두려운 대상인가 보다.

학생들 몇몇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게 쪼르르 달려와서는 두 손을 모으고 시험을 제발 쉽게 내달라며 사정까지 한다.

“걱정 마, 선생님 시험은 쉬우니까.”

학생들은 미심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말이요?”를 반복한다.

“정말이라니까. 너희가 공부만 하면 아주 쉬워.”

학생들은 뜻 모를 태국 탄식어를 후드득 내뱉으며 저리로 뛰어간다.

눈뜨고 감으면 사라지는 엉큼한 하루들이 이어지나 싶더니 어느새 태국 고등학교에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2.

1학기가 5월 중순에 시작되는 태국 학교들은 대부분 중간고사 기간이 7월 말, 기말고사 기간이 9월 말경이다. 

우리 학교의 정식 기말고사 기간은 9월 마지막 주인데, 이때는 태국어, 수학, 과학과 같은 주요 과목들이 시험을 보기 때문에 한국어와 같은 비주류(!) 과목들은 기말고사 기간 전에 미리 봐야 한다.      

중간고사 때 생초보 홍역 치레를 한번 하고 나니 기말고사 문제 출제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한결 여유롭다.

내가 가르치는 고1, 2, 3학년 전공반, 교양반 이렇게 6개 반은 각각 공부하는 교재도 다르고 진도도 수준도 모두 다 달라서 첫 시험 준비를 할 때에는 아주 골머리를 앓았다. 

심지어 반 내에서도 한국어 수준 차이가 천양지차이니 문제 수준의 기준을 잡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교양반의 경우에는 2년간 한국어를 이미 공부했던 고3 반에 한글을 보고 읽을 줄 아는 학생이 40명 정원에서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고 3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이 공부한 기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코로나19로 인한 폐해이니 학생들만 탓할 수 없다. 

고3은 그렇다 쳐도.

교양반 고1 학생들아. 

이 선생님과 첫 세 달간은 한글 익히기만 공부했는데 여전히 한글을 못 읽는 건 선생님 수업이 재미없는 탓이니 너희들이 진정 공부에 흥미가 없는 탓이니(아, 눈물).

교양반 수업시간에 불시 검문하듯 학생들 앞에 단어 카드를 들이대면 대부분은 황급히 자모음 표를 꺼내 태국어로 직접 쓴 음가를 보며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더듬더듬 읽는다.

이런 정성이라도 보여주면 고맙다.

자신의 눈앞 불쑥 나타난 단어카드가 마치 혐오스러운 물체인 양 꺅 소리 지르며 카드를 든 내 손을 저리 밀쳐내 내 성미를 돋우는 학생들도 부지기수다. 

아이고, 머리야...     

한글 자모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시험지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시험지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의구심으로 인해 중간고사 때만 해도 시험문제를 만들어야 하는 이내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시험에 나오는 단어들을 시험 바로 전에 다 알려주고 벼락치기로 달달 외우게 하는, 선배 한국어 교원들의 팁을 그대로 따랐다.


그럼에도 시험 결과는 암담했다.

한 번호로 몰아 찍기, 1, 2, 3, 4 순서대로 찍기, 아예 두 개 답을 적기 등 다양한 찍기 신공들이 펼쳐진 시험지들이 가관이었다. 

더해, 어떤 시험지들은 저, 커닝했어요 고해성사라도 하듯 앞, 옆, 뒤 친구들과 연합으로 똑같이 틀렸다. 

처음에는 헛웃음만 나왔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책의 단계로 넘어갔다.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가 없나...

시험 점수 100점 만점에 50점을 넘지 못하면 학교 방침상 재시험을 봐야 하는데 교양 반 학생들은 과반수가 모두 재시험을 치렀다. 


 3.  

기말고사를 앞두고, 여러 생각에 휩싸였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택한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라면 이 생경한 언어가 가득한 교과서를 펴려는 동력이 전혀 없는 게 아닐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제2 언어로 프랑스어를 배웠지만 그건 학교가 선택해준 언어였다. 

프랑스어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시험 점수는 중요했던 내게 프랑스어는 벼락치기로 하는 공부일 뿐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프랑스어는 내 기억에서 홀연히 떠났다. 

‘봉주르’라는 인사말만 남긴 채. 

그런데 살아보니 어쩌다 프랑스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생기면 희한하게 반갑다.

‘나 고등학교 때 프랑스어 공부했었다’라면서 기억에 전혀 없는 언어를 들먹이며 말 한마디 더 나누게 된다.

     

이 태국 학생들에게도 한국어는 그런 언어이지 않을까.

지금은 학교에서 강제하는 공부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이 수업은 훗날까지 학생들이 지니게 될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생기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어 교사인 내가 해야 할 역할은, 학생들이 가질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예쁘게 채색을 해주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내게서 배운 태국 학생들이 언젠가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하며 ‘나 고등학교 때 한국어를 배웠어요’ 하면서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이 선생님은 정말 기쁠 것 같다. 

여기에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우리 한국어 선생님 때문에 재미있게 한국어를 공부했어요.’라고 기억해낸다면 더욱 기쁠 것 같다.


삼당사락(!)의 미신을 신봉하며 한국의 암울한 입시경쟁을 살아낸 사람으로서 수업은 자고로 진중하고 엄격해야 한다고 믿어왔던 내가 과연 가능할까?

재미있는 수업, 재미있는 선생님. 아직은 난제이지만 정말이지 가능하게 하고 싶다.  


이런 생각에 미치니 이 학생들에게 한국어 시험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진다. 

물론, 나는 태국 학교에서 내게 요청하는 대로 착실히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학생들의 점수를 매길 것이다.

그러나 시험지도 잘 못 읽는 학생들 대상으로 한국어 수준의 변별력을 따지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시험이 좀 쓸모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4.

그래서!

이번 기말고사는 전폭적으로 말하기 시험 비중을 높였다.

한글을 읽지 못하더라도 말하기는 몇 번의 연습을 통해 접근하기 쉬울 테니까.

되도록 일상에서 쓸만한 말들로 시험을 보기로 했다.      

시험 전, 말하기 연습을 개별적으로 시켰고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들에게는 인내심을 가지고 될 때까지 기다렸다. 

시험지에 쓰는 시험 대비를 위해 본시험과 비슷한 모의시험도 보았고 시험에 나오는 단어들을 모은 단어장을 반별로 만들어주면서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고 일러두었다.    

 

5.

엊그제 끝난 한국어 기말고사의 첫 타자 교양반 고2의 시험 시간.

말하기 시험은 학생 한 명씩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상태로 내가 질문하면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학생들의 눈을 가까이서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자세히 듣다 보니 그전에는 잘 몰랐던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특징이 세세히 보인다.      

태연이는 목소리가 참 낭랑했구나, 로아의 목소리는 성우를 해도 되겠구나, 예원이는 컬러렌즈를 꼈구나, 에고, 눈 건강에 안 좋을 텐데(태국에는 컬러렌즈가 매우 대중화된 듯하다. 심지어 구멍가게에서도 컬러렌즈를 판다).

학생들과 부쩍 친근해진 기분이다. 

말하기 시험이 학생들에게는 떨리는 시간이었겠지만 내게는 학생들과 오붓한 데이트 시간이 되었다.

인정한다, 선생님만 신났던 시간.     


말하기 시험이 끝난 후에는 시험지 풀기 시험으로 이어졌다. 

시험지 문제 중에는 1부터 10까지 숫자 중 다섯 개의 숫자를 한글 ‘일, 이, 삼, 사...’로 쓰는 ‘쓰기 문제’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숫자를 한글로 쓰는 방법을 여러 차례 일러주고 숙제도 내고 시험 전까지 쓰기를 연습했던 터라 학생들이 잘 기억해주리라 내심 기대했던 문제다.

시험이 끝날 즈음 답안을 다 작성하고 엎드려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한 학생이 엎드리지 못하고 손바닥을 폈다 쥐었다 하고 있다. 

코맹맹이 목소리가 매력인 애교쟁이 신기다. 

자세히 보니 숫자 이름이 헷갈리는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손가락셈을 수없이 반복하는 중이다.

몇 분간을 끙끙거리며 손가락과 씨름하는 신기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미소가 절로 인다. 

한편으로는 기억을 해내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옆에 가서 슬쩍 힌트를 주고 싶은 충동까지 인다. 하하...

  

 6.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시험이 끝났다. 

시험에서 해방이 된 학생들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하더니 썰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교무실로 돌아온 나는 들고 있던 시험지 더미에서 신기의 시험지를 찾아보았다.

에헤, 결국 숫자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한 모양이다.

어라, 가만 보니 숫자만 틀린 게 아니다. 

다른 문제들에도 정답만 쏙쏙 피해 답안을 썼다.

아이고, 이 녀석! 도대체 공부는 한 거야, 안 한 거야.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다가 얼마 전 책상 위에 써서 붙여둔 포스트잇 글귀를 보고는 애써 평정심을 찾았다.     


포스트잇 가라사대,

학생들이 나와 함께 해야 하는 건 뭐다?

즐겁게 공부하기!



신기가 손가락과 씨름하며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5학년 교양반에 이어 시험 본 5학년 전공반 시험 모습. 사은아, 머리 쥐어뜯게 해서 선생님이 미안!^^;


우등생 면화. 맞는 답도 보고 또 보고 시험 끝날 때까지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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