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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Aug 29. 2022

태국의 '한국어말하기 대회'

태국 고등학생 대상 한국어말하기 대회 참가, 그 여정을 말하다

1. 지역 예선 공고

태국에서는 다양한 한국어 말하기대회가 열린다.

그 중 우리학교에서 매우 신경쓰는 대회는 태국교육부에서 주관하는 말하기대회로 매해 8월 무렵 전국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열린다.

지역 예선이 우선 실시되는데 여기에서 1, 2위 안에 든 팀만이 방콕에서 열리는 전국 본선에 출전할 수 있다.     

지역 예선이 공고된 것은 지난 6월 하순의 일이다.

올해는 스토리텔링과 뉴스, 두 분야에 대한 공고가 나왔다.


스토리텔링은 2~3명으로 팀이 구성되어야 하고 6분간 진행해야 한다. 앞뒤로 30초 가감까지는 허용이 된다.

뉴스팀은 2명으로 팀을 구성해야 하며 4분간 진행, 이또한 앞뒤 30초 가감까지만 가능하다.

지역예선은 비디오로 촬영하여 8월 중순까지 지역 담당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보통은 직접 기관에 모여서 현장에서 말하기대회를 개최했다는데, 이것도 다 코로나19 영향이다.      


2. 새로운 미션이 주어지다

한국어 말하기대회이니 우리 학교에서는 한국어 원어민 교사인 내가 전적으로 이 대회를 준비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은 외부에서 하는 대회의 성과를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이번 대회에 대한 기대도 매우 커요. 선생님이 잘 준비해주실 거라 믿어요.”     

이것은 격려인가, 협박인가.

태국인 한국어교사의 말에 준비 전부터 부담이 승모근 위를 덮쳤다.


수업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밤잠이 줄어든 이 딱한 초보교사는 주어진 새로운 과업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뭘 준비해야 하나. 대회 참가할 학생부터 찾아야겠지? 올해 대회 참가 기회가 마지막인 고 3학생들을 선발하자.’     


3. 누가누가 잘하나

고3 한국어반 학생들에게 숙제를 냈다.

내가 제시하는 글 한 문단을 읽고 녹음파일 보내기.


선발 기준은 거센소리 없이 발음하는지와 ㄹ과 ㄴ 받침 발음을 자연스럽게 하는지였다.

태국어에는 ㄱ, ㅈ이 없어 ㅋ, ㅊ로 발음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가게를 [카게]로, 자동차는 [차동차]로 발음하기 일쑤다.

조사 ‘을/를’ 말하기는 넘사벽 영역이다.

ㄹ 받침이 태국어에는 없다 보니, 한국인이 v와 b발음 구분에 애를 먹는 것 이상의 어려움이 있다.


학생들이 보내준 녹음파일을 들으며 위 발음이 가능한 기준에 부합하는 학생들을 네 명으로 추렸다.

발음이 유창성을 따진다면 1위를 한 해수가 가장 돋보였고 그다음은 소원, 나머지 두 명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해수와 소원이에게 조금 어려운 분야로 보이는 뉴스를 맡겼다.

둘은 단짝 친구라 함께 연습하기도 수월할 테다.

문아와 혜성이에게 스토리텔링을 시켜야지.

한 명이 더 있으면 좋겠는데.

스토리텔링 분야 규정상 2~3명이라니 이왕이면 3명이 역할을 배분하는 게 부담이 덜 할 거 같다.


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고2 한국어반 학생 중 천사가 이름에 걸맞게 마치 ‘천사’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고2 수업시간 중 학생들 한명 한명에게 돌아가면서 한국어를 읽게 하던 어느 날, 천사의 발음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거센소리도 거의 안 하고 ‘ㄹ 받침’마저 자연스럽잖아!

바로 천사를 스토리텔링팀으로 영입했다.     

 

4. 뉴스팀, '망고찰밥'을 소개하다

팀 구성이 끝나고 나서야 학생들과 어떤 주제로 말하기대회를 준비할 것인지 의논했다.

내가 혼자 주제를 찾아보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준비 시작부터 학생들을 참여하게 하고 싶었다.


먼저, 뉴스팀이 제시한 주제는 ‘망고찰밥’ 이야기다.

찰밥에 망고를 곁들여 연유를 뿌려 먹는 망고찰밥은 이미 태국의 유명한 간식이다.

뉴스거리가 될 만한가 싶은데, 이게 몇 달 전 태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음악축제인 ‘코첼라’ 음악축제에서 태국 여성 래퍼 ‘밀리(Milli)’가 공연 도중 망고찰밥을 먹는 퍼포먼스를 보여 전 세계적으로 망고찰밥이 유명세를 얻게 된 거다.

망고찰밥의 인기를 실감한 태국 관광청은 이 인기에 편승해 망고찰밥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태국다움(Thainess)’ 즉, 태국의 문화를 세계 방방곡곡에 알리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한 태국 관광청이 하지 못한 일을 어린 가수 밀리가 해낸 쾌거, 흥미로운 뉴스감이지 않나.

이러한 내용에 덧붙여 태국 정부가 세계에 알리려고 하는 ‘태국다움’이 무엇인지, 이것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곁들여보자.

소심하게 기대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 내용을 통해 발표하고 듣는 태국 학생들에게 태국에 대한 자긍심이 얼마쯤 생겼으면 좋겠다.

뉴스팀 소원이가 앵커를, 해수가 리포터를 맡아 서로 이 소식을 주고받으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대본을 썼다.     


5. 수 차례 뒤엎은 스토리텔링팀의 주제, 결국엔 '아기 돼지 세 자매'

그다음은 스토리텔링팀의 주제 잡기.

나는 태국동화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갸우뚱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하다는 태국동화들을 찾아보니 우선 내용이 너무 길다.

어떤 건 무섭거나 괴기하고 어떤 건 한국의 막장 드라마인 줄 알았다.


결국 학생들은 각각 양치기 소년, 아기 돼지 삼형제, 금도끼 은도끼를 추천했고 만장일치로 ‘아기 돼지 삼형제’가 채택되었다.

문제는 역할분담이었다.

학생은 3명인데 등장인물은 3마리의 아기 돼지, 늑대, 잠시 나오는 엄마 돼지, 그리고 해설자까지 붙이면 6명.

맨 처음에는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세 파트로 나눠서 한 명씩 한 파트를 맡아 대본을 읽게 했더니 이야기 흐름이 너무 맹맹했다.

그래서 3명 학생에게 6가지 캐릭터를 2가지씩 나누려니 해설자 부분이 애매하다.

해설자는 이왕이면 한 명이 맡아서 끌고 나가는 모양새가 좋을 것 같다.        


결국, 발음이 가장 부드러운 천사가 해설자를,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문아가 엄마 돼지와 첫째, 똘똘한 셋째 돼지를, 왈가닥 혜성이가 천연덕스러운 둘째 돼지와 못된 늑대를 맡았다.


역할 배분이 새롭게 되고 다시 대본을 고친 후 연습을 시키면서 퍼뜩 든 생각.

삼형제가 아니라 세 자매이면 어떨까.

형제라고 하기에 학생들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여간 형제 느낌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하는 스토리텔링이기도 하니 돼지들의 혈연관계를 형제에서 자매로 슬쩍 바꿔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한편, 태국동화를 선택하지 못한 미련이 남은 나는 태국적인 것을 동화내용에 슬쩍 넣고 싶었다.

어디에 그런 내용을 넣을 수 있을까를 염두하며 학생들과 연습하던 중, 벽난로로 막 들어오려는 늑대를 걱정하는 언니들에게 막내 돼지 문아가 “언니들, 걱정하지 말아요. 가마솥에 물을 끓이면 돼요.”라고 하는 말에 번뜩!

이 부분에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바뀐 문아의 대사는 이랬다.

“언니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집에 치앙마이에서 사 온 풍등이 있어요. 풍등에 불을 붙여서 벽난로 위로 날리면 돼요.”

치앙마이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풍등 날리기’ 행사로 유명한 관광지다.

막내 돼지가 치앙마이 놀러 갔다가 사 온 풍등을 이용해 벽난로 위로 날려 늑대 꼬리에 불이 붙는다는 야심 찬 설정이다.

태국 사는 셋째 돼지가 풍등을 날리는 게 가마솥에 물을 끓이는 것보다 더 신속한 방법이면서도 태국스럽지 않나.

무모한 무리수였는지 학생들이 이 부분을 연습할 때 자꾸 실소를 터뜨린다.

얘들아, 선생님은 심각하다구!     


스토리텔링에 입체성을 더하기 위해 노래도 짧게 넣었다.

‘곰 세마리’ 노래를 돼지 세 마리로 가사를 바꾸니 딱이다.

이야기 도입 부분에서 ‘돼지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첫째 돼지, 둘째 돼지, 셋째 돼지...’ 노래하니 돼지 소개에 흥이 더해졌다.


이로써 스토리텔링의 내용도 모두 완성!     

이제부터는 연습만이 살 길이다.

연습하자 연습.     


6. 그렇게 열심이면 선생님이 감동하잖아

근 한 달동안 두 팀 학생들과 아침 조회시간마다 교무실 옆 복사실에 모여 연습을 했다.

밤에는 학생들과 SNS로 연락하며 학생들의 발음을 교정했다.

각 대본에는 제법 긴 문장들이 곳곳에 있기도 하고 어려운 단어들도 제법 많아서 외우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동영상 촬영할 때는 학생들 앞에 대본을 큼지막하게 써서 붙여놓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웬걸, 염려와 달리 학생 모두 대본을 달달 외워냈다.


학생들의 열정이 저질 체력 교사의 자양 강장제가 되었나.

눈을 반짝이며 연습하는 학생들을 보면 고질적 만성피로가 자취를 감춘다.

거 참, 희안하다.     


연습이 거듭되니 각자의 발음과 표정, 움직임도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다만, 학생들 혀에 자리를 잡아 꿈쩍 않는 거센소리 발음과 익숙해지지 않는 ㄹ 발음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 영역은 정말이지 쉽사리 고쳐질 것 같지 않다.

고3 학생들 사이에서 고2 천사가 잘 어울릴까 우려했는데 언니들이 어찌나 잘도 동생을 챙기던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었다.

팀워크까지 준비가 되니 이제는 동영상 촬영만이 남았다.    

 

7. 마지막 단계, 동영상 촬영

동영상 촬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서니 긴장이 되었는지 실수들이 반복되었다.

긴장으로 경직된 입에서는 어색한 발음이 튀어나왔고 한번 발음이 꼬인 부분에서는 계속 꼬였다.

연거푸 이어지는 NG.

하루 만에 끝날 줄 알았던 동영상 촬영은 우여곡절 끝에 3일에 걸쳐 겨우 끝이 났다.

 

곱게 한복 차려입은 말하기대회 팀 학생들과 함께!


8. 결과, 두둥탁!

그러니까.

결과가 뭐 어땠길래 이리 글이 길었냐고?

그 이야기를 아껴두고 하기 위해 그간의 준비과정 설명에 너무 힘이 들어갔음을 양해해주시길.

8월 마지막 토요일인 엊그제 나온 따끈한 심사발표다.

결과는....

바로!

뉴스팀은 2등, 스토리텔링팀은 무려 1등이다.

두 팀 모두 방콕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요일이었지만 학교에서 행사가 있어 출근했던 나와 동료 태국인 한국어교사 펜은 결과 발표를 함께 보고는 믿어지지 않아 잠시 멍해하다 다시 결과를 봤다 환호하다 부둥켜안고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집에 있을 학생들에게 SNS 그룹채팅방으로 소식을 알리니 환호의 육성을 대신하는 별의별 이모티콘이 채팅방을 온통 뒤덮었다.

기뻐하는 학생들 모습을 직접 보면 더욱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전국대회 출전에 대한 부담감은 잠시 접어두고 얼마간은 이 기쁨에 취해있고 싶다.


잘난 제자들을 둔 교사의 마음을 알아버렸다.

자칫 중독이 되어 기준을 이리 둘까 두렵기도 하지만.

거, 며칠만 좀 취해 봅시다, 단 며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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