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어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 안 통하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를 고려해볼 수 있다.
같은 말을 쓰는데도 관점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달라 말이 통하지 않거나.
언어 자체가 다르기에 말이 통하지 않거나.
나의 마지막 연애는 첫 번째 이유, 같은 모국어를 쓰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연속되면서 각자 멀어질 결심을 했다.
연애의 끝 무렵, 툭하면 쏟아졌던 말들.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난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아니, 내 말을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어?
우리의 대화는 늘 서로의 말을 곡해하여 맘이 불편한 상태로 입을 다물기 일수였다.
그런 만남이 몇 년이나 길게 이어졌던 건, 초기 연애 몇 달 이후로는 각자 줄곧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떨어져 살았던 이유가 컸다.
만남은 서로의 휴가나 누군가가 일이 없던 시기에 이루어졌고 보통은 SNS와 이메일로 겨우 연명하던 연애였는데, 그런데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잦다 보니 관계는 늘 외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연애가 길어지면서 사람이 바뀐 걸까. 그건 아니었을 거다.
연애 초기, 도파민이 홍수처럼 분비되던 시기에는 말 안 통하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거다.
차츰 말 안 통하는 상황이 인지되던 연애 중반에는 정성과 품을 들여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했다.
어느 시기부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이해하려는 품을 들이지 않고 있음을 발견했고 그렇게 사랑의 종말을 직감했다.
그렇다.
사랑은 품이 드는 일이다.
서로의 관계에 품을 들이지 않는다는 건 정당하게 '멀어질' 사유가 된다.(나는 보통 연애에 '헤어질'이란 표현보다 '멀어질'이란 표현을 선호한다)
우리 둘 사이를 면면히 이어주던 끈끈한 점성은 그렇게 떨어져 나갔다...
서두가 길었다. 연애 얘기만 나오면 여전히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널을 뛰네.
연애 얘기는 언제 어디에서건 흥미로운 주제!
정리하자면 내 연애는 말이 안 통하는 첫 번째 상황, 같은 모국어를 사용함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의 체험적 사례되시겠다.
한편!
나는 요즘, 말이 통하지 않는 두 번째 상황, 다른 언어권에 살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의 희생양이라도 된 듯 온몸으로 외로움을 체감 중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태국 학교의 교무실은 40여 명의 교사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제법 규모가 큰 교무실이다.
내 자리 옆에는 태국인 한국어 교사가 앉아있고 주변에는 모두 태국인 교사들이다.
외국인 교사들은 널찍한 교무실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앉아있다.
영어가 익숙지 않은 일본인 교사 한 명과 침묵 수행이라도 하러 태국에 온 듯 과묵한 영국인 교사, 그리고 필리핀 영어교사가 세 명이나 있는데 그들은 같은 국적끼리 똘똘 뭉쳐서 다닌다.
그러니 태국어는 전혀 안 되는 나에게 보통 말할 상대는 내 옆자리 태국인 한국어 교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내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의 말동무 한국어 교사가 요즘 들어 부쩍 옆자리에 없다.
학교의 잡다한 일들로 교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보는 것 같은데 그녀마저 내 옆자리에 없으니 적적하고 더해 외롭다.
이런 생각마저 든다.
한 명뿐인 태국인 한국어 교사로서 한국인인 나를 계속 신경 써줘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가끔은 따로 있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타당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존재가 펜 선생님에게 또 다른 업무가 되는 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다.
이럴 땐 일본인 교사가 내심 부럽다.
일본인 교사와 함께 일하는 태국인 일본어 교사가 3명이나 있어서 교무실에 나란히 앉아있으니 교무실에서 그녀 곁에는 일본어로 일을 의논하고 말동무가 되어줄 누군가가 늘 있다.
교무실의 공기에는 태국인 교사들의 왁자지껄한 태국어라는 주요 원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심심치 않게 필리핀 교사들의 따갈로그어나 영어, 그리고 일본어도 섞여 있다.
곧잘 영어를 하는 태국인 교사들도 좀체 먼저 외국인 교사들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다.
내가 먼저 말을 걸면 늘 단답식 답으로 대화가 금방 끝이 난다.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 이상할 것도 없다.
한국인들이 모인 사이에서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 한 명 끼어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아마 그 한 명의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영어로 소통하려 노력하겠지만 그 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에 다다를 테고 아무리 우리가 배려를 한다 해도 한 명뿐인 외국인이 느낄 소외감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영어 사용에 자신이 없다면 우리는 굳이 내 영어 실력을 다른 한국인들 앞에 선보이기를 꺼려하지 않던가.
이러한 생각들을 해보면 지금 나의 이 소외감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머리로 하는 이해와 달리 내 감정은,
마치 태국어의 바다에 오롯이 떠 있는 섬처럼 외.롭.다.
다른 지역에서 일하는 한국인 교사들과 소통하는 SNS 채팅방에서 다른 학교 분위기를 물어보았다.
대부분 학교 분위기는 우리 학교와 대동소이했지만 방콕에서 멀어질수록 학교 분위기가 외국인 교사에게 좀 더 살가워지는 듯하다.
한 한국인 교사의 우스개 말 한마디.
태국인 교사들끼리 얘기할 때 나도 좀 끼워달라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참에 태국인 교사들 몰래 열심히 태국어 공부를 연마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태국인 교사들이 자기들끼리만 얘기할 때 ’ 나도 다 알아 들었거든!‘라고 깜짝 놀라게 할까 봐요.
오, 신박한 방법인데?
결국 소통을 위해서는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해서 외롭다면 내가 품을 들이는 수밖에 없는 거다.
그게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연인 간에 말이 안 통해 외롭건,
다른 언어 문화권 안에서 이방인으로서 말이 안 통해 외롭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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