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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Oct 06. 2022

살맛과 죽을맛 사이

태국 고등학교에서 느끼는 인생의 단맛 쓴맛 혹은 살맛 죽을맛에 대하여

1.

학생이 없는 학교에 출근하고 있다. 

학생들의 방학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교사들은 학생들 성적 처리 등 남은 업무로 인해 학생들보다 방학이 열흘 가량 늦게 시작된다.

학생들이 만드는 왁자지껄한 소란이 사라진 학교 건물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기를 잃었다.

나도 덩달아 풀이 죽었다. 

‘학교에 학생들이 없으니 기운이 없네요.’

‘하하. 역시 신입 교사가 할 만한 감상에 빠지셨군요.’

쓸쓸해진 이내 감정을 토로하자 태국에서 한국어 교원 생활을 오래 해온 선배 교원이 풀이한 명쾌한 해석은 이러했다. 

나, 아직은 학생들과의 허니문 기간인건가.

학생들이 시시각각 방출하는 다양무쌍한 에네르기파에 노출된 하루들이 버거워 방학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학생들이 사라지니 마냥 적적하다.

심지어 통제가 안 되는 소란으로 내 고고한 마음을 온갖 육두문자로 뒤덮어주는 교양반 학생들의 수업 시간마저 그립다.     


2.

교양반 수업에 생각이 미치니 미안해지는 학생 한 명이 떠오른다. 

초롱, 그 아이의 한글이름은 초롱이다. 

학기 초, 한글을 처음 배우는 고 1 학생들에게 한글 이름을 제비뽑기로 뽑게 했고, 그때 그 아이가 고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발음이 태국 사람들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건가. 

그 아이는 자기 이름이 처음 호명되었을 때 기이한 소리를 지르며 굉장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학생들과의 원활한 언어소통이 힘든 나는 그 이름이 얼마나 발랄하고 산뜻하고 귀여운 이름인지를 온몸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러나 나의 노력이 역부족이었는지 출석을 부를 때마다 초롱이는 자기 이름을 따라 발음하며 숨이 넘어가듯 깔깔거렸다.

혹독한 이름을 만들어준 나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3.

초롱이가 속한 반은 대학 입학에 뜻이 별로 없는 학생들이 모인 반으로 취업준비반과 같다.

한국어과에서는 이 반을 한국어 교양반이라 부른다. 

공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는 건 수업 분위기에서부터 확연히 티가 난다. 

수업 시간 내내 자는 학생들, 아예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뒤돌아 앉아 잡담하는 학생들, 이어폰을 끼고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는 학생들.

수업시간에 쓰기 활동을 시키고 교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학생들은 몰래 보고 있던 넷플릭스 영화를 아예 대놓고 내게 보여주면서 재미있다는 듯 엄.지.척.을 한다. 

수업시간인데 어쩌면 이리 뻔뻔할 수가 있지.

내가 칠판에 판서를 하고 있으면 내 등 뒤에서는 태초의 혼돈과 같은 광경이 벌어질 때도 있다.

수업 시간에 교사의 등 뒤에서 빗자루를 타고 다니거나 친구를 등에 업고 활보하는 학생이 있다면 믿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학생들을 제지할 방도가 별로 없다는 거다.

교양반은 나뿐만 아니라 태국인 한국어 교사도 통역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보조로 참여하여 뒷자리에 앉아있는데, 이 태국인 교사도 학생들의 소란을 거의 지켜 보고만 있다.     


“펜 선생님, 애들 멱살 잡아도 돼요?”

어느 날에는 분노가 치밀어 뻘소리를 했는데 태국인 교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조심해야 해요.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학생들은 몰래 다 비디오로 찍고 있거든요.”


4. 

미셸 파이퍼가 열연한 오래 전 영화 중에 ‘위험한 아이들’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교사로 분한 미셸 파이퍼는 한 고등학교 문제아반을 맡게 된다. 

이제 막 부임한 그녀를 맞이한 것은 흡사 클럽에 온 듯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교실이었다.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대혼란의 교실 장면에서 나는 ‘영화에나 있을 법한 교실’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맞닥뜨린 상황에 진저리를 쳤던 기억이다.

교양반 수업에 들어갈 때면 나는 왕왕 그 장면을 떠올린다.

나를 기다리는 ‘영화에나 있을 법한’ 상황이 오늘은 지난 시간보다 좀 덜 하기를 바라며. 

‘미셸 언니, 언니는 참 좋겠어요. 그건 영화였잖아요.’     


5.

이 소란의 중심에는 늘 초롱이가 있다.

한국의 유명 래퍼 이영지와 같은 엄청난 성량을 보유한 초롱이는 수업 시간 주요 잡음들을 주도한다. 

심한 소란이 일어날 때마다 태국인 교사까지 합심해서 겨우 학생들을 안정시키고 내가 하는 말을 따라 말하게 하면 초롱이는 그 기차 화통과 같은 성량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 해서 학생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고나면 교실은 다시 그 전의 소란 상태로 돌아간다.      


초롱이가 있는 교양반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늘 수십 차례 복식호흡을 하고 목캔디를 두 개씩 입에 물고는 이번에는 기필코 학생들을 조용히 저지시키고 수업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교실 문을 연다.

그리고는 어김없는 요란법석,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업시간.

교양반 수업을 끝내고 나올 때마다 나는 탈모를 잠시 잊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나에게 교사 자질이 없는 거 아닌가’  울적한 자괴감에 짓눌린 채. 

그나마 함께 수업에 참여하는 태국인 교사가 있어서 소란의 데시벨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6.

그러던 어느 날. 

태국인 한국어 교사가 해야할 학교 일이 있으니 내게 교양반 수업을 혼자 들어 가란다. 

나 혼자? 교양반 수업을??

수업 진행이야 어차피 나 혼자 해왔으니 가르치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교양반 학생들은 한국어도 영어도 안되고 나는 태국어가 안되니 자세한 문법 설명이나 과제 설명은 태국인 교사의 태국어 통역이 필요하다.

나 혼자 수업에 들어가는 전공반의 경우, 학생들이 기본적인 영어소통이 가능해서 혼자 수업을 하고 있지만 영어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교양반에서는 나 혼자 수업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음. 이건 핑계이려나. 

솔직히 나는 혼자서 그 소란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게 더 큰 걱정이었다.

외국인 교사 혼자라는 생각에 학생들의 소란은 얼마나 더 의기양양해질 것인가.

의지하던 단 하나의 보호막이 벗겨진 기분이었다.

혼자 들어가야 할 교양반 수업시간이 다가오자 어떤 역경과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밀림 속을 제 발로 들어가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교사가 수업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다니. 

못났다, 참, 못났어!


이번에는 보통때보다 곱절 더 복식호흡을 하고 목캔디 세 개를 잘근잘근 깨물면서 수업에 들어갔다.      


7.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가.

태국인 교사가 없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소음의 데시벨 한계를 풀어버렸다.

내가 칠판을 향해 등 돌리기가 무섭게 학생들은 수업 시간이라는 걸 망각한 듯했다. 

이 정도면 교실이 아니라 테마파크다.

내 말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 있기는 한 건가.

학생을 지목하고 일어나서 대답하라고 하면 태반이 끝까지 일어나지 않고 옆 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는 모릅니다. 얘를 시키시죠’라는 몸언어를 한다.      


극도로 예민해진 나는 한 명의 제물이 필요했다.

그때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 있던 초롱이가 눈에 띄었고 초롱의 이름을 호통치듯 부르고는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다.

만만치 않은 초롱이. 

목소리도 눈도 큰 초롱이는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태국어를 속사포로 쏟는다. 

학생들은 그 말이 재미가 있는지 웃고 난리가 났다.

이러한 상황에의 대처법은 내가 배운 한국어 교수법에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난 그저 돌덩이처럼 굳어버릴 수 밖에.

할 말을 잃은 나는 학생들을 보면서 한동안 침묵을 했다. 

조용해진 교사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포착되었는지 학생들의 소란은 차츰 잦아들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어요. 그리고 초롱이는 교무실로 와요.”

이 말을 한국어로 한번, 영어로 한번 그리고 아는 태국어 단어 몇 개와 몸언어로 다시 한번 설명한 후 수업을 일찍 마쳤다.     


8. 

학생을 교무실로 부른다는 건 태국에서도 범상치 않은 상황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교무실로 온 초롱이는 교실에서 보여주는 그 당당함이 한풀 꺾여 여느 학생들처럼 다소곳해져 있었다.

초롱이를 불렀다지만, 나는 초롱이와 어떻게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둘이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태국인 교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초롱이에게 잘 타일러 달라고 요청했다.


태국인 교사의 말을 경청하던 초롱이가 뭐라고 항변을 한다.

“뭐래요?”

“자기 목소리가 원래 큰데 그걸 어떻게 줄이느냐는데요.”

아이고, 이 녀석. 아무렴 내가 너의 성량 문제로 널 교무실로 부른 거겠니.

태국인 교사가 초롱이에게 한참을 설명했고 초롱이는 내게 “커톳 카(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는 교무실에서 퇴장했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무력함이란.

내 언어로 타이르지 못해 남의 힘을 빌려 학생의 용서를 구한 무력하고 구차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억울함이 밀려왔다.

초롱이에게도 미안했다. 

교무실로 불러내기 이전에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미안함과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사과말을 강제한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함.     


9.

그 다음번 초롱이가 있는 교양반 수업.

이번에는 태국인 교사가 병가를 냈다. 

또다시 혼자 그 반을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한 번의 소동을 겪은 탓인지 나는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초롱이는 수업 내내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있었다. 

초롱이의 목소리가 섞이지 않았을 뿐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소음은 자가발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수차례 “조용히 하세요!” 고함을 쳐야 했지만 이제 그 정도는 일상처럼 느껴졌다.

풀이 죽은 초롱이를 보니 아직은 어린 학생이구나 했다. 

그 일로 애꿎은 한국어까지 미워하면 어쩌나.     


10.

방학을 앞둔 며칠 전, 초롱이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초롱이가 황급히 눈을 피하는 모습에 인사하려던 내 손이 멋쩍어졌는데 조금 후 초롱이가 마음을 바꿨는지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고는 또박또박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저 초롱이에요!” 인사하고는 후다닥 사라진다. 

초롱이의 인사에 내 기분도 순간 맑음으로 변했다.     


11.

이 사건은 앞으로도 첩첩이 쌓일 학생들과의 많고 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되겠지만 나는 궁금하다. 

이러한 경험들이 체득되는 동안 외국인 교사로서 나는 얼마만큼 성숙하고 견고해질까.

가르치는 업에 종사하다보니 학생으로 인해 살맛이 나다가도 어느 날은 학생들 때문에 죽을맛이기도 하다.

살맛과 죽을맛 사이에 놓인 줄 위에서 중심을 잘 잡고 ‘왕의 남자’ 공길이처럼 멋들어지게 줄타기를 할 날이 내게도 오려나. 오겠지?


중년의 묵직한 나이임에도 나는 여전히 성장 중이다.

앞날에 예정된 노화만이 있는 게 아니라니 이런 인생, 제법 그럴싸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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