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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Oct 29. 2022

주위를 돌아보면, 주의를 기울이면 보이는 것들

태국의 방학이 끝나고 학교 일상으로 돌아오다

1.

시월이, 붉은 파장을 내지르며 뒤를 향해 전력질주 중이다.

달콤했던 방학은 무심히 끝나버렸고 이제는 학교로 출근하고 있다.

출근은 하고 있지만, 수업은 다음 주부터라서 학교에는 교사들만 있다. 

방학 내내 늘어져 지냈을 교사들이 학교 일과에 온전히 복귀할 기회를 준 학교의 재량이 극진한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픈 심정이다.  

방학 동안  교재는 덮어두고 화끈하게 놀아주마, 그 단호했던 결의를 부단히도 착실하게 실천했던 탓인지 새벽 기상, 이른 아침 출근이 이토록 고될 줄이야.     


방학 후 만난 학교 교사들이 나를 보고는 “바다에 다녀오셨나 봐요?”라고 짐작이 간다는 듯 인사한다.

방학 내내 태국의 동쪽 남쪽 바다를 돌아다닌 흔적이 내 피부에 고스란히 박혔다.

누구는 구릿빛으로 멋들어지게 선텐 하던데, 나는 늘 푸석한 연탄 색이 얼룩덜룩 발려진 꼴이다. 

‘이래서 너는 감히 선텐을 하면 안 돼’라는 핀잔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만, 그렇다고 어찌 ‘바다’를 포기 하누.      


2. 

정식 수업 전이라지만 학교에 아예 학생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학교 밴드부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루 종일 퍼레이드 연습 중이다.

매년 11월 초, 우리 동네가 속한 차층사오 주(Chanchoengsao 주)에 매년 열리는 큰 축제가 열리는데 그날 하이라이트인 시가행진에 우리 학교 밴드부도 참여할 예정이란다.     

방콕 옆에 붙어있는 곳이면서도 관광객의 큰 이목을 끌 특색이 없는 소도시이다 보니 도시 자체가 늘 밋밋 맹숭했는데 축제를 앞두고 마을 곳곳에 생기가 흐르고 있다. 

그 축제에 우리 학교 학생들도 참여한다니 기대가 크다.

그날은 어디 다른 동네로 나돌아 다닐 생각하지 말고 꼭 우리 동네에 붙어있어야지.     


학교 운동장과 홀 이곳저곳에서 밴드부 학생들이 파트를 나누어 연습하는 것을 방해가 될까 몰래 훔쳐보다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들어 촬영을 했다.     

“선생니임~ 안녕하세요!”

나를 발견한 몇몇 학생이 또박또박 한국어 인사말을 던졌다. 

‘안녕하세요’의 주인공들은 아마도 나와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일 텐데, 이를 어쩐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너희를 내가 도통 알아볼 수가 없구나.     

수업시간에 마스크를 낀 얼굴만을 보며 수업을 해온 탓에, 나는 학생들을 두상과 눈매, 입김으로 들썩이는 마스크로 기억을 한다.


마스크를 벗으면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닌 상황이 발생해서 당황할 때가 많다.     

한국인의 경우도 마스크를 벗었을 때를 예상했을 때와 실물이 같을 수는 없지만 같은 혈통의 종족들이고 많이 봐온 얼굴 형태들이라 그런지 대략 상상과 유추가 가능한 편이라고 한다면.

태국인들이 마스크를 벗은 온전한 얼굴 모습이 대략 이러할 것이라는 나의 가늠은 늘 예상을 벗어난다.


태국에서 실내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라도 된다면, 내 인지 회로에는 상당한 혼란이 야기될 예정이다.

학생들 이름과 마스크 쓴 얼굴을 매치해서 외우는 것도 이 노쇠한 뇌가 몇 달에 걸쳐 이뤄냈는데.

마스크를 온전히 벗고 사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내가 가르치는 약 240여 명의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시 외워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테다.

그러니까 마스크를 벗은 아이들은 그간 내가 알던 소미도 사랑이도 유정이도 아닐 거라는 거.

학생들의 온전한 얼굴을 늘 궁금해했으면서도 새롭게 아이들을 다시 기억해야 할 앞날을 생각하면 살짝이 걱정부터 앞선다.


마스크를 벗은 자신을 이 선생님이 바로 알아봐 주지 못해 실망하면 어쩐다.


참 부질없는 걱정처럼 들리겠지만. 

나에겐 덜컥 겁부터 앞서는 미래이다.       




3. 

이번 주는 아직 수업이 없어 근무시간이 매우 여유롭다.

출퇴근 기록만 제대로 해두면 근무시간 동안 교무실 자리를 오래 비워도 그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아직은 신입 교사의 신분이다 보니 그 누구도 주지 않는 눈치를 스스로 챙기며 되도록 교무실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점심시간만은 제대로 호기로운 여유를 부리고 있다.     


"오늘 같이 밖에 나가서 점심 식사할래요?"

일본인 교사 사야카가 내 책상 앞으로 오더니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청했다.

내성적이고 늘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녀가 이렇게 먼저 선뜻 점심식사 제안을 해주다니 고맙다.

     

다음 주부터 정식 수업이 시작되면 다른 교사들과 함께 외부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테다. 

여타 직장인들이 대부분 같은 시간대, 그러니까 12시부터 1시간가량의 점심시간을 동일하게 같이 갖는 것에 반해 태국의 학교 시간표에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다. 

점심시간은 수업 시간표에 따라 그날그날 쉬는 시간을 찾아서 점심시간을 챙겨야 하고 교사들마다 모두 다른 수업 시간표를 가지고 있어 수업이 시작되면 외국인 교사들은 대부분 혼밥에 길들여진다.


사야카와 함께 학교 근처 강변 안 가본 음식점을 도전해보자 하고 자리를 뜨는데 교무실 한쪽에서 세 명의 영국인 교사들과 한창 수다를 떨던 필리핀 교사 제프가 “점심 먹으러 가는 거라면 나도 데리고 가!”라며 훌쩍 뛰어와 내 팔짱을 낀다.


“영국 선생님들이랑 식사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제프?”

내 물음에 제프는 늘 그렇듯 솔직하게 대답한다.

“나는 이상하게 백인들이랑 같이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져서 말이야.”

“네 남자 친구도 백인이면서 엄살은.”

그렇다. 동성애자인 제프는 영국인 남자친구와 내년이면 결혼도 할 예정이다.

“그것과는 좀 달라. 난 역시 동양인인가 봐. 동양인들과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니까.”

제프는 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이면서도 예의 바르게 표현한다.

그런 그의 진솔함이 참 좋다.      


4.

세 사람이 찾은 음식점은 학교에서 약 20분가량을 걸어야 하는 강변에 위치한 곳이다.

평소에는 더위를 뚫고 걸어가야 하는 불편함과 점심시간을 활용하기에는 먼 거리라는 이유로 잘 가지 않는 곳이다.

세 명 모두 처음 가는 곳을 그저 구글맵에 평점이 좋다는 이유로 찾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처음 가보는 음식점이라 기대 반 걱정 반.     


아. 당황스러운 건, 영어 메뉴판이 없었다.

그럴 땐 보통 메뉴판에 음식 사진들을 올려놓기 마련인데 이곳 메뉴판엔 온통 태국어만 가득하다.

구글 번역은 돌려봤자 음식의 정체를 제대로 알려주기엔 한계가 컸다.

우리나라 음식점에 간 외국인이 번역기로 곰탕, 순대, 엽기떡볶이, 할머니손칼국수와 같은 음식을 번역한다면 그 음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이 태국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다행히 이 집은 현지 맛집인지 구글맵 리뷰에 올라온 사진이 꽤 많은 편이어서 구글맵 리뷰 사진을 돌려가며 음식을 골랐다.

문명의 이기는 말야, 인정하기 싫다고 가끔 오기도 부리긴 하지만, 참 쓸모가 있다니까.     


리뷰 사진을 돌리면서 말이 안통하는 주인 아저씨와 손짓발짓하여 시킨 음식. 안전하게 똠얌꿍과 케일볶음, 그리고 이 집 리뷰 사진에 가장 많이 나와서 호기심을 자극한 생선카레찜


5. 

음식점은 창이랄 것도 없이 벽의 반이 강을 향해 뻥 뚫려있는 형태이다.

음식을 맛나게 먹고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옆으로 이동식 수상(水上) 코코넛 가게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코코넛 가게 주인아저씨는 식당 손님들을 상대로 살며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호객을 하지 않는다.

배가 불러서 코코넛 주스가 들어갈 틈이 없는데 어쩌지, 그래도 하나만 사 먹을까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저씨는 이 맛난 걸 못 먹으면 너희만 손해라는 듯 순식간에 우리를 등지고 훌쩍 퇴장하셨다.  

   

"참 ‘유니크(unique)'한 삶이지?"

제프의 말에 다시금 아저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뒷모습을 보이며 강 깊숙이 점이 되어가는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러한' 삶은 어떤 걸까 생각해 봤다.     

강이 근무지인 삶.

강과 함께 하루를 열고 닫는  삶.


코코넛 한알 한알로 지탱하는 삶이 고단할 수도 있겠지만

강과 함께 하는 저 삶 자체가 유니크한 하나의 '예술'과 같구나 감. 히. 감상했다.

아저씨의 현실과 괴리가 있는 철없는 감상일지언정.

내 시선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어버린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전율을 느꼈다.     


찾아보면 예술이 됨직한 것들이 우리 주변에 이리도 널려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주의를 기울이면 보이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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