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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거든요.”…잊지 못하는 문장

23년 전 그녀, 내 ‘인성(人性) 성적표’를 건넸다?!

by 전직 기자 김지수 Mar 16. 2025

2002년을 며칠 남겨두지 않았던 그해 연말은 추웠다. 한기는 이대역 지하 2층까지 뚫고 들어왔다. 덜덜 떨릴 만큼 추운데도 사람들은 들떠있었다.


승강장 안 의자에 앉아있었던 나는, 열차를 몇 대나 보냈는지 모른다. 언론사 입사 시험에서 탈락했다는 이메일을 확인한 후 좌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누가 나를 치기라도 하면 죽일 듯 달려들 기세였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것 아닌가.


‘씨발, 뭐야. 이건.’


올려다보니 젊은 여자였다. 내가 살벌하게 노려보는데도 그 여자는 말을 건넸다.   

  

“죄송한데요.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나요?”     


황당했다. 제발 꺼져주기만 바랐다.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기요.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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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이 나오려 했다.


‘이년이 처돌았나.’


무시하려다가 뭐 이런 또라이가 있나 해서 물었다.

    

“뭐라는 거죠?”

“이쪽요.”

“네?”


그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지하철역 출구들에 관한 정보가 표기된 안내표지판이었다. 그녀의 검지가 짚은 곳은 2번 출구 쪽에 가까웠다. 인근 빌딩들 이름과 근처 정류장에 서는 버스들 번호가 보였다.


짜증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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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씨가 안 보이세요?”     


내 목소리에서 표독스러움이 묻어나다니. 신데렐라의 계모급이었다. 가뜩이나 열받아 미치겠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 아닌가. 기분은 그녀가 어깨를 쳤을 때부터 상했다. 그런데 한 문장이 내 귀로 들어왔다. 평생 잊지 못하는 문장.


“네, 안 보여요. 제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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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시력을 잃어가다니. 실명, 시력 상실을 말하는 건가. 눈이 불편한 상태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황스럽다.

 

“잘 안 보여서 물어보신 건가요?”


내 태도가 공손해졌다. 어르신한테 여쭙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거의 안 보여요. 제가 2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데요.  눈은 흑백으로 큰 덩어리, 작은 덩어리 이렇게만 볼 수 있거든요.”


이 여자는 세워 놓는 안내표지판과 나를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로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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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뒤통수를 가격 당한 것 같았다. 앳된 그녀의 입에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그녀는 인생에서 ‘큰일’을 겪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이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언론사 시험 떨어졌다고 세상 다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미안했다. 그러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원망도 들었다.


‘안 그래도 시험 떨어져서 비참한데, 너까지 나타나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냐. 난 언론사에 들어갈 실력도 안 되는 데다 인성(人性)까지 문제가 있다는 거냐.’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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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헛갈릴 때는 마음이 원하는 걸 실행하는 게 정답이다. 당장은 모르더라도 나중에는 잘한 선택이라고 느낀다. 그때 난 그녀를 돕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가이드를 자처했다. 2번 출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출구 앞에서 지인과 만나기로 했다며 출구로 이어지는 역사 1층까지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미친 오지랖’ 어떡하나. 내 오른팔은 이미 그녀의 왼팔을 감고 있었다. 누가 보면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팔짱을 낀 채 걸었다. 조심조심. 그녀가 사람들과 부딪칠까 걱정됐고 내 딴에는 배려한다는 행동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신경 쓰였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가면서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참았다. ‘따뜻한’ 침묵이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탔고 출구로 이어지는 곳에 이르렀다. 조심히 가라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고 곧 사라졌다.


‘잘 가요. 미안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인생을 담대하게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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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씨가 안 보이세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말이, 하필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를 줄이야. 누군가 내 슬픔이 모인 곳을 건드렸다고 생각해 보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어떤 마음이어야 시련이 삶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어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과연 어떤 마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이 질문은 힘들 때마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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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그녀는 또렷하다. 해상도 높은 사진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보건의료 전문기자 시절, 대학병원 안과 외래 진료실에 있는 망막센터를 취재할 때마다 두리번거렸다. ‘혹시 그녀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녀는 심각한 상태였기에 중증 환자들이 많이 찾는 망막센터를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살다 보면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런 일을 겪어 본 사람은 인연이라는 걸 떠올릴 때가 많다. 나는 그녀와의 드라마틱(dramatic)한 재회를 상상할 때가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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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신기했다. 한 번의 마주침이 끼친 영향은 컸다. 나는, 내 이기심의 민낯을 봤다. 다정하고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향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만 ‘작동’했던 게 분명했다. 그녀를 통해 이런 사실과 마주했을 때 불편했다. 내 ‘인성(人性) 성적표’를 보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날은 마음에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었다. 괴로움으로 가득 차 넘칠 지경이었다. 나의 다정함이 품고 있는 온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마음은 빙하였다.


그날 이후 내 마음의 온도 차를 줄여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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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한 건 또 있다.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것. 그녀의 삶 한 단면을 통해 여왕을 봤다. 여왕의 품위란 이렇게 주체적이고 당당한 것이라는 사실. 그녀는 시련을 삶 속에 녹여 일상을 담대하게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인생에서 어떻게 꽃길만 걸을 수 있겠는가. 가다 보면 자갈길, 진흙탕길, 때로는 동물의 배설물이 나뒹구는 길도 만난다. 중요한 건 꽃길이 아닌 곳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것,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 품격 있는 삶이란 그런 것일 테다.


담대하게 흔들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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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이 흘렀다. 최근 몇십 년 사이 우리나라 의술의 발전 속도는 빨랐기에 그녀가 예전의 시력을 거의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력 상실을 막을 수는 없어도 속도를 늦춰주는 시술과 수술, 약 등 치료 방법이 고도화됐으니까. 그녀는 젊고 건강했으니 치료 경과도 좋을 거라고. 그래서 나를 TV 뉴스에서 보고 알아보지 않았을까.


‘저 싸가지, 기자가 됐네. 딱이네.’


날 보고 욕해도 좋으니 시력이 남아있었으면 했던 순간들이 있다.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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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인생에서 깨달음이나 영적인 자극을 주는 대상은 ‘완벽한타인인 경우가 많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 우연히 접한 영화 속 대사 한 마디에서 삶을 다시 살아도 깨우치기 힘든 진리, 진실을 마주한다.


오래전, 디지털카메라 TV 광고에 나왔던 문장이 떠오른다.


‘인생에서 멋진 사진들처음 만난 낯선 이가 찍어준 것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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