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간의 기자 생활은 지옥… 그때 가장 많이 웃었다는 건?
화장이 잘 받는 날이 있다. 늘어진 모공도 안 보이고 인조 속눈썹을 이용한 깊어 보이는 ‘눈알’ 완성! 자잘한 주름은 ‘환장’한 듯 웃지만 않으면 된다. 깊은 주름은 보톡스로 해결. ‘이 네 방은 서비스입니다.’ 피부과 원장님이 묻지도 않고 찌를 땐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만족이다.
에세이 출간 후 언론과 첫 대면 인터뷰를 마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멍했다. 올라탄 마을버스는 정차 중이었다.
“저기요.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쪽이 제 이상형이라서 그런데요.”
소리 지를뻔했다. 야호!
잘생긴 청년이 내 앞에 서 있다. 빛나도다, 그 이름. 청년(靑年)! 어쩌지. 내 나이가 몇인데, 정말 일찍 시집갔으면 이런 아들이 있을 텐데. 뉘 집 아들인지 부모님이 알면 충격이라고 생각했다.
“어쩌죠. 저 결혼했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맙게 생각하지만 결혼한 몸이라고 했다. 청년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너의 여자 보는 안목은 탁월한데, 난 결혼했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어필했다.(저는 현재 미혼입니다.^^)
청년은 집요했다.(사실, 이것도 맘에 들었음.)
“진짜예요? 진짜 결혼하신 거 맞아요?”
“네. 어쩌죠.”
“그쪽이 제 이상형이에요. 전철 안에서 보고 따라왔어요. 결혼하셨다는 거 믿을게요. 안녕히 계세요.”
“조심히 가세요.”
청년은 큰 키에 얼굴은 주먹만 했고 옷도 잘 입었다. 많이 먹었어야 20대 후반이었다. 처음 본 여성에게 용기 있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도 멋있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웃음이 나올뻔했다. 시력이 나빠서인지 나를 굉장히 어리게 본 게 웃기기도 했지만, 청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대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어삼합을 환장하는 나는 생선 비린내에 민감하다. 그는 나를 어촌 어딘가로 데려다준 것 같았다. 바닷가 마을에 널려있는, 막 건조되기 시작할 때 나는 생선 냄새다.
‘신장(콩팥)이나 간에 문제가 있나. 이 정도면 심한 건데.’
보건의료 전문기자 시절 취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아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많이 피곤하면 입냄새가 날 때가 있다.
지난해 가을, 나를 잠시 어촌으로 ‘데려다준’ 청년 이야기를 꺼낸 건 ‘웃음’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내 삶에서 유머는 빠질 수가 없다. 언론사 생활에서도 유머가 통하는 선후배들과의 소통은 힘이 되었다.
10년 전쯤 후배와 나눈 카톡 대화는 이렇다.
[후배] “선배, 표정이 나라 잃은 거 같아요. 뭔 일 있어요?”
[나] “기분이 안 좋아.”
[후배] “왜요. 그러지 마요. 선배 앞에 좀 봐요. 바로 정면.”
[나] “싫어.”
[후배] “앞에 있는 새끼 좀 봐요. 빨리요.”
내근할 때 정면에 설치된 파티션 때문에 마주 보고 앉는 선배 얼굴은 머리 윗부분에서 눈썹까지만 보였다. 그는 문제가 많아 사람들이 싫어했다. 후배의 재촉에 못 이겨 앞을 봤는데, 선배의 머리가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닭 볏(벼슬)처럼 머리 중앙을 세워 스타일링하는 헤어가 폭격 맞았다. 닭 볏이 잘린 것 같았다. 칼로 닭의 목을 쳐 참수해야 하는데 칼날이 빗나가 닭 볏이 잘린 것처럼. 나는 미친 여자로 빙의될 뻔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걸 놓치지 않은 후배 놈이 카톡으로 말을 걸었다.
[후배] “선배, 웃기죠? 그냥 웃어요. 저런 새끼도 사는데, 선배가 왜 힘들어해요.”
[나] “고맙다. 저 새끼 어제 외박한 듯.”
우리는 낄낄거렸다. 나는 웃음이 많다. 그리고 사람들을 웃기는 걸 무지 좋아하고 그런 재능에 우쭐했다.
우울이 날 괴롭힐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잘 웃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겁나’ 잘 웃고 사람들을 잘 웃겨서 신(神)이 내게 우울을 보낸 것이라고. 형평성을 위해.
한 번은 한 회사 노조 위원장을 취재할 때였다. 현안이 엄중한 것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노조 위원장은 말을 이어가다 고개 숙이며 한숨을 쉬었는데, 그때였다.
나는 일할 때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내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가 일반적이지 않을 때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게 불쾌감을 넘어 상처를 줄 수 있다. 또 내가 소시오패스로 오해받을 수 있다. 이날도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가마가 보였는데, 하필 두 개였다. ‘쌍가마’다. 보조개처럼 두 개가 사이좋게, 수줍은 신부의 양 볼에 붙인 연지곤지처럼. 뭐든 쌍은 고운 이미지가 있는 게 맞았다. 머리카락은 까만데 피부가 하얘서인지 가마가 눈에 띄었다. 방향은 동일했다. 풍차 두 개가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는 거 같았다.
난 왜 그럴까. 인성에 문제가 많나.
영상취재기자가 노조 위원장 뒤쪽에 서서 인터뷰하는 나를 찍고 있었다. 그 후배는 내가 고개를 숙였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고 했다. 우리의 유머 코드는 같았기에. 머지않아 본인도 죽을힘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고 했다.(쌍가마인 분들을 비하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웃음은 조직 생활의 윤활유였으나 날 긴장시켰다. 언론사는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인간문화재급 또라이들을 모아놓아서 웃긴 일도 많았다.
우리가 소시오패스라고 불렀던 부장이 여는 회의에서 부원들은 그가 하는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해줘야 했다. 하필 왜 내가 부장 앞에 앉았는지. 그가 이야기할 때 나는 시선을 그의 볼따구니 쪽으로 뒀다. 언젠가 후려갈길 거라며 상상하며 저 볼따구니를 보고 있었는데, 뭐가 붙어있었다. 처음에는 뾰루지인 줄 알았다. 고춧가루 덩어리가 말라비틀어져 붙어있는 것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대기.
‘아까 칼국수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 먹은 티를 저리 내냐. 얼마나 허겁지겁 먹으면 칼국수에 넣어야 할 다대기가 보조개 옆에 붙냐.’
에라 모르겠다. 웃음이 터졌다.
“김지수 씨, 왜 웃어? 뭐가 웃겨? 내가 웃겨?”
“…”
“말해봐. 내가 웃겨? 내가 웃기냐고! 내가 웃겨?”
“안 웃깁니다.”
두세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들이 왜 웃었는지 ‘포인트’를 알았다. 보통, 이럴 땐 “죄송합니다.” 이래야 하는데, 내 답변은 “안 웃깁니다.”였다. (후배들아, 미안하다. 같이 죽자는 전략이었다.)
“김지수 씨, 나가. 밖으로 나가.”
“지금요?”
“응. 나가.”
“네.”
웃음인지 방귀인지 정체 모르는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부장이 화가 나서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면 되는데, “지금요?”라고 묻는 나도 웃기고 대답하는 부장도 웃기고.
그때 살벌했다. 나는 회의실 밖으로 쫓겨났다. 잠시 후 두 명의 후배도 나왔다. 우리들은 자발적 ‘입틀막(입을 틀어막는다)’.
17년 간의 기자 생활은 한때 우울과 공황이 똬리를 틀만큼 힘들었다. 신기한 건 그 시간 가장 많이 웃었다는 것! 이것도 신(神)이 베푸는 ‘형평성’ 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앞으로도 그때를 떠올리며 웃을 일이 많다는 건 확실하다.
정신 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쓴 자전적 에세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유머와 웃음이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들 중 하나로 유머를 꼽았다. 유머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고 그는 말했다. 이 책은 나치 강제 수용소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며 그 안에는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유머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실감 나게 보여줬다. 이들의 노력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들을 찾았던 것 같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처럼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았지만, ‘나다움’을 지키기 위한 내면의 싸움. 웃음이 많은 기질이 변할까 두려웠던 것 같다. 기자로 활동하면 웃음보다 이성적인 판단과 사고,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하는 차가움이 앞서게 된다. 게다가 나는 우울이 곁에서 호시탐탐 일상을 노리고 있었으니.
요즘도 웃는다. 곡소리가 나야 하는 처지인데도 과거를 소환하면서 웃는다. 버티기 위함이며 나다움을 지키기 위함이다.
나는 내 글을 보면서 독자들이 ‘빵’ 터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곳곳에 ‘장치’를 해둔다. 그게 제대로 먹히는지 알 수 없지만 웃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나만의 유머 ‘포인트’로 오늘도 TV 뉴스를 보면서 구시렁거리며 ‘중계’한다.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