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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어르신’을 목욕시키며…

얼마나 사랑했으면 같은 ‘병’에 걸린 것일까

by 전직 기자 김지수 Mar 30. 2025

‘어르신’을 목욕시키는 일은 예민한 작업이다. 노쇠한 나신(裸身)을 보는 건 언제나 아프다. 빛나던 시절은 가고 없고 쓸쓸함만 남았다.

     

씻기는 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를 본인 다리에 가져다 대 온도를 체크한다. 어르신의 약한 피부가 행여라도 극받지 않을까 확인하는 것이다. 샤워기를 어르신의 등 쪽으로 대면 물줄기는 등뼈와 허리뼈를 타고 흐른다. 야위고 탄력 없는 피부 탓에 뼈의 돌기들이 두드러진다.

    

나는 목욕제를 거품 내 어르신 등에 큰 원을 그려 마사지한 후 손끝으로 살살 문지른다. 내 손이 머리로 가면 어르신은 예민해진다.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왼손으로 귀를 막고 오른손으로 귀 뒤를 긁어주면 어르신은 소리를 낸다. 시원하다는 거다. 클라이맥스는 배를 씻길 때다. 100세 어르신이지만 분홍 빛 도는 속살은 보드랍다. 엉덩이와 다리 근육도 남아있다.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걷기에 탄탄할 수밖에 없다. 발가락 사이사이 마사지하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만져준다.

     

헹굼은 철저해야 한다. 귀를 막은 채 구석구석 거품을 제거한다. 충분히 헹궈야 피부병이 생기지 않는다.

어르신을 따뜻한 곳으로 데리고 와서 드라이기로 말린다. 어르신이 신경질을 부린다. 축축한 걸 싫어하니까. 이때도 드라이기를 내 다리에 대고 온도를 체크한다. 저온 화상의 위험이 있기에. 어르신 얼굴을 내 가슴 쪽으로 향하게 한다. 온풍이 눈으로 들어가면 각막이 손상될 수 있어서다. 신경 쓰이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건을 두른 채 어르신을 안고 드라이기로 말리면 뽀송뽀송해진다.

      

이 일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어르신은 내 삶의 스승이요, 친구요, 주치의다. 조건 없이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는 어르신을 보면서 삶은 따뜻해졌다.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기쁨이었는데,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로 인해 어르신이 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가슴이 무너졌다.

    

코로나 시국이었을 때 어르신은 분리 장애를 겪었다. 가족과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심하게 짖었다. 전문가를 집으로 불렀다.

     

“혹시 집에 우울증 겪고 계신 분이 있나요? 아이가 우울증입니다.”


전문가는 어르신을 보자마자 우울증인지 알았다고 했다.  

눈치챘겠지만, 어르신은 반려견이다. 만 17세 말티즈 수컷 ‘개 동생’으로, 사람 나이로 치면 100세라서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 집으로 모신 반려견 훈련사가 어르신의 표정을 보고 우울증이라고 하면서 가족 중에 누가 이 병을 겪고 있냐고 물었던 것이다.


훈련사는 어르신에게 신경 쓰고 잘해주라고 했다. 가족이 어르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반려견은 주인의 습성과 성향, 기질을 닮게 돼 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을 때 나는 항상 가면을 썼다. 혼자 있을 때만 가면을 벗었으니 어르신은 내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마음 아픈 건 나는 나았어도 어르신은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 마음의 병을 앓았던 주인을 만나 그 모진 병을 겪는 어르신에게 많이 미안하다. 죄스럽다.

     

어르신이 가족이 되고 지금까지 나는 직장을 세 군데를 다녔다. 두 번의 이직이 성공한 것인데, 이 말은 정말 바빴다는 것이다. 어르신과 놀아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퇴사 후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니 어르신이 치매에 걸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다고 인생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치매에 걸렸어도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어서 교감할 때가 있다. 주인을 알아볼 때가 있다는 말이다. 이때 난 내가 어르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최대한 표현한다.


어르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 모든 게 낯설다. 둘의 관계가 서먹하다. 너는 누구냐는 눈빛은 그동안의 세월을 한방에 때려눕힌다.


다정다감한 성격이 치매에 걸린 후 무뚝뚝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건 어르신이 나와의 관계를 잊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우리 인간도 낯선 사람에게 다정할 수 없듯, 어르신은 내 존재를 잊었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어르신이 내게 아는 척을 할 때가 있다. 그땐 예전 눈빛이다.


어르신은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걷는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돌다가 잠시 멈췄다가 돌고 발짝 걷다가 계속 돌고 이게 무한 반복이다. 치매로 인해 멈추는 행위, 앉는 행위를 잊었다. 걷는 걸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침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때도 피곤하고 졸려야만 잠들기 때문에, 걷는 걸 멈추려면 어르신이 피곤할 때를 포착해 침대에 놓아야 한다. 졸리지 않으면 침대에서 뛰어내려 또다시 걷는다. 끝없이.


가족이 외출할 때 어르신 때문에 교대로 한다. 집에 어르신만 있으면 어르신은 피곤하고 졸려도 침대로 올라갈 수 없다. 계속 걷는다. 부득이하게 가족이 같이 외출했다가 집에 면 어르신은 어둠 속에서 걷고 있다. 끝없이 걷고 돌고 걷고 돌고. 우리가 왔는지도 모른다. 어르신은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어르신을 번쩍 들어 침대에 놓으면 그때 잠든다.

어르신은 시력이 나빠져 잘 보이지 않고 이빨도 거의 빠져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사료를 따뜻한 물에 불려줘야 하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단팥빵도 조금씩 떼어줘야 한다. 남아있는 이빨들이 별로 없어 입안에 든 음식물이 이빨 사이로 빠져나온다. 내가 곁에서 흘린 걸 다 주워서 어르신 입에 잘 넣어줘야 한다.


치매는 본인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도 잊게 한다. 어르신은 사료를 먹다가 물을 먹으면 다시 사료를 먹어야 한다는 걸 까먹는다. 수발을 들어야 한다.


청력도 나빠져 자신을 불러도 모른고, 안 들리다 보니 짖지도 않는다. 짖는 건 잠잘 때뿐이다. 잠꼬대하면서 작은 소리로 컹컹컹.


변해가는 어르신이 낯설고 겁날 때도 있었지만, 이런 모습도 어르신의 일부다. 나중에는 이런 모습이 더 그리울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 보면 고장 난 봉제 개 인형 같다. 등에 건전지 몇 개를 넣은 털 다린 개 인형도 걷다가 돌고 걷다가 도는 것을 반복하다가 멈춘다. 그런데 이건 고장 나서 계속 반복하는 꼴이다. 개 인형은 건전지가 다 닳으면 멈추기라도 하지. 어르신은 뭔가. 생명체는 다 슬프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르신이 떠나면 상심이 두려울 것 같아 어르신 이름과 생년월일이 들어간 온라인 비밀번호를 바꾼 적이 있다. 이젠 그러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엄밀히 따지면 호상(好喪)’이다. 100살 넘어 가족의 사랑과 보호 속에 떠날 것이니.

늙고 약해진 몸을 씻길 때마다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의 정의는 많지만, 어르신이 알려준 건 책임이다.


주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속마음을 읽고 헤아려 주인의 ‘표정까지 닮을 수 있었을까. 나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앓았던 어르신에게 끝까지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런 기회를  고마울 뿐이다. 이런 생각도 했다. 내게 누나 노릇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려고 어르신이 치매에 걸린 건 아닌지.


걷다가 다리 아프면 잠시 멈춰 서고 앉는 것, 제발 기억났으면 한다. 그래야 먼 길 떠날 때 쉬면서 가지. 그래야 무지개다리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손 흔드는 누나와 엄마를 한 번은 바라보고 갈 수 있지. 아가야. 우리 아가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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