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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상암동’, 세 번의 방문이 남긴 것

“죽을힘 다해 최선 다한 것도 내 책임…노력하라고 등 떠민 사람 없어”

by 전직 기자 김지수 Mar 27. 2025

1990년대 대학교를 다녔던 나는, 틈만 나면 여의도에 갔다. 여의도 광장 어느 지점이었는데, 그곳에 서면 지상파 방송사 3사의 건물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바라만 봐도 좋았다.


라디오 방송사에서 시작한 기자 생활은 경제지를 거쳐 국내에서 기자 가 가장 많은 언론사로 이직하는 데 성공하며 절정을 맞았다. 보건의료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재할 수 있는 자리까지 꿰찼다.


의사 출신이 아니라는 한계를 딛고 의사 출신인 기자들이 쉽게 시도할 수 없는 것들에 도전했다. 나는 사업가 마인드가 있었아이디어를 내 회사 사업과 이어지게 했다. 인맥은 넓어져 단독 취재‧보도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의료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송사들에서 전문 패널이나 강연자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내 안에 ‘교만의 싹’이 자랐던 것 같다. 내 인생을 집어삼킨 교만이…


브런치 글 이미지 1

2014년 12월, 상암동을 찾았다. 가장 입사하고 싶었던 방송사의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지내는 의대 교수님과 나의 동반 출연이었다. 프로그램 스태프는 나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대기실 문에는 교수님과 내 이름이 나란히 쓰여있었다. TV에서 본 전용 대기실이었다.

     

녹화가 끝났고 담당 PD님은 몇 달 뒤 미니 특강 형태로 출연을 요청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회사와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방송에 ‘환장’한 이미지를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날은 내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기자로서 전문성을 가지고 임한 지상파 방송 첫 출연이었다.(당시 회사 부서장은 나를 싫어했다. 그 뒤로 그 프로그램에서 두 번 더, 다른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요청이 왔지만 부서장은 윗선에 보고하지도 않은 채 출연하지 못하게 했다.) 교수님은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으나 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 둘러댔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잊고 지냈던 얼굴 하나가 생각났다. 곰돌이 ‘푸우(Pooh)’를 닮은, 곰의 형상을 했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한동안 술만 처먹으면 세상에 푸우 닮은 놈들, 곰 닮은 놈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했다.(죄송합니다. 곰이라는 별명을 지니신 남성 분들에게.)   


‘아, 그 푸우가 여기 다녔지!’     


첫사랑은 풋풋한 햇사과 같다는데, 내 첫사랑은 ‘매운탕’이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확 풀어 떠 있는 거품마저 시뻘건 메기 매운탕. 그 사람이 이별을 선언했을 때, 나는 발악하며 저주했고 협박했다. 나보다 7살이나 많았는데도 ‘개새끼’라고 했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나 놓친 거 평생 후회할 거야. OOO(방송사 이름)만 다니면 다냐? 내가 성공해서 네가 나한테 출연해 달라고 빌게 만들 거야. 이 개자식아.

     

대학생이었을 때 방송사 PD를 알게 됐고 잠시 만났다. 그는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고 나는 폭발했다. 서로가 좋아해도 남들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고 그런 이유로 헤어질 수 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지만, 당시 나는 이게 무슨 개소리냐 개논리냐는 입장이었다. 모든 게 여러 모로 부족한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곰 닮은 새끼’가 그리울 때도 고된 일상에 지칠 때도 결심했다.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는 자리에 올라 그때는 사랑이든 뭐든 잃지 않을 거라고.


브런치 글 이미지 3

다시, 2014년 12월의 상암동이다.


밤이 됐다. 둥근달이 푸우 오빠 얼굴 같았다. 오빠가 나를 지켜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난날을 추억할 여유가 없었기에. 우리 마지막 날, 나한테 뒤지게 깨지고 박살 나고 평생 들을 욕을 듣고도 찍소리 못하고 서 있던 곰탱이 푸우 오빠. 이 건물 어딘가에 있겠구나 생각했다.


‘오빠 덕분에 나 여기까지 왔어. 고마워. 나 계속 지켜봐 줘야 해. 잘 있어. 오빠.’


상암동을 떠나면서 머지않은 미래에 나만의 브랜드를 내세워 이곳을 찾겠다고 결심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10년이 흘렀다. 2024년 1월, 상암동을 찾았다. 전철 안,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 미팅이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역사 환승 통로를 지나다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박카스 두 병을 마셨다.  ‘희망고문’ 악몽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엄마]  후유증이야. 정신 차려. 오늘 만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잖아. 최선을 다해야지.


몇 달 전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 쪽과 일이 틀어지면서 뒤통수를 맞았다. 극복했다고 믿었는데,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후유증이 제대로다.

    

‘어차피 안 될 건데 뭣 하러 기운을 빼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냐.’     


내 안에 악마가 속삭였다. 이 악마 새끼를 박카스 두 병으로 때려눕혔다. 곧 만날 엔터 대표님과 이야기를 잘해야 한다고 마음을 잡았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도착, 지상으로 나왔다.   

   

‘아, 상암동!’

     

10년 전이 떠오른다.

      

왜 하필 상암동…’  

   

그 자신만만한 김 기자는 어디 갔는가. 그녀 대신 기죽고 굳은 표정의 중년 여성이 서 있다.

    

억울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새벽 3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출근했다. 시키지 않는 일도 찾아서 했다.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구내식당에서 물 마시듯 밥을 먹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인성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살려고 애썼다. 지적 호기심을 키워야 한다고 믿고 뭐든 배우는 자세였다. 현직 기자인데도 신문 칼럼을 찢어 스크랩해 빨간펜으로 밑줄 그으면서 생각을 확장시키는 연습을 했다.

     

‘아, 근데 씨발!’  

브런치 글 이미지 5

화장이 번지면 안 되는데, 빌어먹을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에게 예쁘게도 보여야 하는 자리여서 우는 것조차 참아야 하는 현실이 비참했다.


‘아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면서 속이 뻥 뚫리며 개운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이건 또 뭔지 모르겠다.

     

당시 날 힘들게 한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가슴속으로 화를 삼켜 어쩔 때는 내가 녹아버리거나 재가 될 것만 같았다. 자고 일어났는데 나는 없고 침대 위에 회색빛 가루만이 남아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돌아버릴 것 같은 순간들,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애썼던 순간들. 그러다 이곳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내 안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던 것 같다. 버려야 할 것들과 취해야 할 것들이 혼재된 상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이날 폭발했다.

    

‘난 잘못한 게 없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선택했으니까.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한 것도 내 책임, 그런데도 망했으면 내 책임이다. 노력하라고 등 떠민 사람은 없다.’

     

‘극적인’ 장소에 와서 10년 전의 나와 조우(遭遇)한 덕분에, 뒤엉켰던 머릿속은 ‘한큐에’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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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왔다. 약속 시간까지 40분 남았다. 늘 이렇다. 먼저 와서 분위기를 익힌 후 미팅 때 해야 할 말들과 얻어내야 할 답변들을 시뮬레이션한다.

     

대표님에게 보여줄 ‘깜짝’ 제안서를 살펴봤다. 그는 이게 뭔지 모른다. 이 정도로 열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마땅한 샘플이 없었다. 열정이 물건도 아니고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말이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제안서를 드리기로 했다. 나를 방송인으로 영입하지 않더라도 그 제안서는 대표님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아깝지 않다. 그런 작업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늘 이런 식으로 일해왔다. 이게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뭐든 선제적으로 도전적으로 해내는 것.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려면 앞으로 달려 나가면 된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탓만 할 수는 없다.

     

2주 후 영입 불발이라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무리하게 추진한 그에게 고마웠을 뿐 상처 이런 건 없다. 지금도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퇴사 후 위기들을 겪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 ‘그럴 만한 상황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예전엔 이런 걸 이해 못 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빨리 얻어내야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나의 이런 성향이 누군가에게 ‘기자 갑질’ 일 수 있었다는 걸 퇴사 후에야 깨달았다.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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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두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젠장. 이런 게 인생인지.

  

퇴사한 지 2년 됐는데, 기자 때가 전생 같이 느껴진다. 까마득하다. 전직 기자 김지수가 아닌, ‘전생 기자 김지수’다.(유튜브 채널, 전직 기자 김지수 놀러 오세요! 제 채널입니다. 클릭! ☃️기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는 까닭

)     

이날 대표님과 헤어진 후 역으로 가는 길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엄마에게 드릴 소금빵과 ‘개 동생’에게 줄 스콘을 샀다.(이 ‘개 동생’은 개 같은 성질의 인간 동생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개(dog)를 의미합니다. 욕이 아닙니다.)


2025년 3월, 1년여 만에 상암동에 왔다. 이날 상암동은 모 금융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고 해서 왔다. 챗봇 상담이라고 온라인 알바인 줄 알았다.

   

챗봇은 온라인상의 보이지 않는 로봇 아닌가. 고객 질문에 답해주는 AI 시스템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챗봇’들이 말을 하고 통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돌아다닌다. 내 예감이 맞았다. 기자를 그만뒀어도 ‘기자 정신’은 평생 가지고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주 업무는 챗봇 상담이 아니었다. 그쪽에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이해했으나 꼭 이랬어야 했는지 아쉬웠다. 다만, 직원들은 따뜻하고 인간적이었다.  그들도 나름의 사정, 상황이란 게 있겠지 생각했다. 한층 너그러워진 나를 발견했다.     


1년 사이, 나의 시선이 따뜻해질 수 있었던 건 지금은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걸 받아들인 후부터다. 기다릴 줄 아는 것도 능력이고 재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기다림은 수동의 의미가 아니다. 부족했던 나를 돌아보고 갖춰나가는 시간다.     


상암동이 디지털미디어시티로 바뀐 후 이날까지 세 번의 방문이었다. 네 번째 방문은 엄마와 맛집을 ‘뽀개러’ 가는 것일 수 있다.

  

이날도 엄마와 ‘개 동생’에게 줄 빵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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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꿈을 이루려면 이 세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 ‘노력하기, 인내하기, 기다리기.


기다림에는 그동안 내가 벌인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시간도 포함된다. 다 끌어안아야 한다. 나의 경우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있었다. 신중했어야 했다. 나의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걸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많이 아팠다.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기다림의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 중요한 건 언제부턴가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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