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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다르게 보면 넓어지는 이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타인을 사랑하긴 어려웠다.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역겨움'이라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 조차도 이런데, 타인은 어떨까?'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뇌에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자신을 사랑하면 타인도 사랑한다.' 이 말은 내게 2가지 의미를 던졌다. 첫째로 나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둘째로 타인을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둘 중 하나겠지.



그러던 어느 날, 한 멘토가 내게 힌트를 줬다. 나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아는 데,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겨운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버렸습니다. 저 조차도 역겨운 모습을 지녔고, 이걸 사랑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길었거든요. 그런데 1명이 아닌, 여러 명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내 이야기를 듣자, 멘토는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죠. 잘하고 계시네요. 그게 당연한 과정이죠.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을 동시에 봤다는 것이니까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고, 타인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여기서 '자신'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되죠. '나'에 대한 의미를 너, 부모님, 친구, 스승, 더 나아가서 우리, 세상이라는 표용력을 지니고 쓴답니다. 그렇게 하나씩 관점을 늘려나가면 되는 거예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오'라는 입 모양이 만들어졌다. 더군다나 내가 했던 고민을 다시 통찰하게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과 동시에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일찍 깨우쳤다. 이성을 사랑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 다르듯, 자신을 사랑하는 표현 방식도 개개인마다 편차가 있다. 내가 일찍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깨우쳤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해롭다는 걸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 중학생이 되자, 술과 담배를 즐겼다. 내게도 수 차례 권유했었다. 나도 인간이기에 이 사회 구성원에서, 집단에서 퇴출당하기 싫어 어울렸다. 하지만 이 역할 극은 내겐 역겨웠다. 머지않아 잘못된 사실을 깨우치고 퇴출당하기 싫다던 집단에서 제 발로 나왔다.



술과 담배가 안 좋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내겐 그런 걸 즐길 깡이 없었다. 굳이 이런 쾌락을 즐기면서 미래의 고통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술을 먹으면, 담배를 피우면 몸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서 하지 않았다.



18살 때는 탄산이 남자의 정자에 안 좋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탄산도 끊어버렸다. 피자를 먹을 땐 보리차를 먹었고, 치킨을 먹을 땐 물을 먹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오래 살겠다, 오래 살겠어.'



20대가 되어서는 진정으로 자신에 대해 알고 싶었던 계기가 하나 생긴다. 바로 연애였다. 2년 가까이 되는 연애를 하면서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있다는 걸' 알았다. 더군다나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순간도 꽤나 많았다. '난 왜 그러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사랑과 야망은 별개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랑이 끝나자, 야망도 끝나버렸다. '사랑을 하기도 전에 꿈꿨던 야망이 왜 사랑이 끝나니까 사라지는 걸까?' 하루에 감정과 이성이 아이들이 탄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하며 나를 지배하려 애썼다. 웃기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를 알아내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다. 



내게 과거 삶을 물어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 삶에 관한 질문을 들으니, 냉철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사랑이 끝나서부터 심리 상담을 받는 날까지, 인생에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그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눈물이 아니었다. 그간 자신을 외면했던 자신에 대한 눈물이었다. 바위라고 믿었건만, 살아가기 위해 만든 바위였다. 



그 후로 철학을 사랑하게 되었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자신을 돌봤다. 3년이 지났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다. 바위는 말랑해졌고, 전반적으로 말랑한 인생이 되었다. 그렇게 여러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다 보니, 선하다고만 생각했던 내 모습에 악한 모습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에 이어 너, 부모님, 친구, 스승, 우리, 세상 등으로 관점을 넓게 잡는다면 사랑의 범주는 당연시 늘어나게 된다는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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