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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행 속에 갇힌다는 것은

죽음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삶이 더 두렵다.

by 보리차

당신은 죽고 싶었던 순간이 있는가?


갓난아이가 아니라면, 모두들 한 번쯤은 생각했을 법한 화두. ‘죽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두려워해왔다. 하지만 내일이 너무 무서워서, 미치도록 두려워서 난간 아래를 치켜 내려다본 적이 있다. 그것이 비로소 옳음이고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답이 될 수 없다. 죽음은 포기의 수단은 될 수 있어도, 결코 답은 아니다. 삶도 답이 아니다.


천재에게도 불행은 있었다. 천재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이상의 12월 12일. 그 활자 속의 두려움은 독자를 떨게 만든다. 절망하게 만든다. 쉬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지러운 활자 속의 두려움만큼은 미치도록 선명하게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삶의 두려움.’


처자식을 잃은 주인공의 괴로움을 차마 헤아릴 수도 없었다. 끔찍한 기억에 마을을 떠나려 하던 주인공은 동생 T에게 제안했지만, 처자식들이 버젓이 살아있는 한 떠나기 어렵다며 둘러둘러 거절을 했다. 의가 없던 형제였기에, 미련도 없이 떠났을 것이다.


12월 12일. 그의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마을을 떠나 살아가다가, 어머니마저 잃고 남은 것은 고작 보잘것없는 움집 하나뿐이었다. 그 움집마저 식당에서 요리사로 취식하게 되며 주어 버리고, 빈곤함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주변이 점점 휑해지며 느껴지는 절망이 선명하게 신음하며 내 가슴으로 스며들어온다. 이상의 정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의 삶의 고통에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을지, 이런 평안한 삶을 사는 필부로서니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토로(트럭)에 치여 절름발이가 되었다.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도박도 하고 수없는 나날동안 방황하다가 만난 여관 주인이 자신에게 상속한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살아갈 자신이 없던 것이다.


12월 12일 그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일종의 회피였다.


사람은 중요하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하지만, 있어서도 괴로움뿐이다. 그 사람을 잃거나 그 사람에게 배신당하거나. 인간관계의 끝은 그것뿐이다. 이상은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정확하게 그의 개인사를 찾아보지는 않아서 모른다. 오로지 이상의 소설만으로, 그의 마음을 온전히 완연하게 누리고 싶었다.


이상은 젊은 나이에 그걸 처절하게 느낀 것이었다. 감정선이 정확하지는 않고, 상황 위주로 나와있기에, 그 감정을 직접 말해주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이상의 작품은 최적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자의 상상력을 극도로 이용하는 초현실주의 작가답다고 느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형제인 T 씨의 아이 업을 보았다. 업은 오만방자했다. 잘못된 가정교육 탓이었다. 죽마고우 M씨도 보았다. M 씨는 업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그 지원마저 끊어버리고, 주인공과 병원을 개업했다.


그러나 업은 점점 엇나가고, 주인공과 M 씨의 병원의 간호부와 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간호부는 나고야에서 잃은 동료의 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 곳 없던 분노는 업이 간호사와 해수욕을 가기로 해서 구비한 해수욕도구를 불사르며 해소가 되는 듯싶다가도 그 분노는 더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다.


절망뿐이다. 업은 그대로 요절하고 T 씨는 주인공을 원망하여 주인공의 집과 병원에 방화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은 자신이 시작했고, 도망쳐왔던 선로를 쳐다보았다.


12월 12일. 그는 포기했다.


눈발이 휘몰아치는 철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C간호부의 아이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그것은 시작이기도 했으며 끝이기도 했다.


그의 주변인들이 전부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 또한 삶에 자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가 잘못한 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업의 해수욕 도구를 불사른 것은 분명 주인공의 잘못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처자식들과 어머니가 죽고, 친해졌던 여관 주인이 죽었으며, 다리가 절름발이가 된 것은 결국 그의 잘못인가?


분명히 주인공은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해서 술을 마시며 어머니의 고독한 죽음을 잊으려 애쓰고, 고통을 머금고 일어서려 애썼다. 하지만,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따라오는 절망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분명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시련이 나를 찾아온다는 느낌. 모든 걸 내려놓기를 바라는 가슴속의 절망은 이윽고 분노가 되어, 삶의 의욕을 전부 잃고야 마는 그런 고통. 천재인 그의 머릿속 또한 절망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것을 12월 12일로써 보인 것뿐이다.


고통.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는 고통이 그를 좀먹었다. 너무나도 슬픈 글이다. 슬프다기보단 아픈 글. 절망을 내디디고 시작하는 작품 속의 첫 12월 12일. 고통을 회피하며 몸부림치는 두 번째 12월 12일. 절망을 받아들이고, 이내 죽음을 택하는 마지막 12월 12일.


이상이 꿈꿨던 것이며, 살기 위해서, 썼던 글이다. 이상은 이때쯤 첫 번째 12월 12일을 겪으며 자신이 겪어갈 고통에 대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우리도 살자. 나아가자. 희망도 안 보이는 이 우울 속에서 살아가자. 두려운 삶들이 우리를 좀먹고 있음을 선명하게 느낀다. 당신은 마지막 12월 12일의 주인공보다 부디 첫 번째 12월 12일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길 바란다.


내일이 미치도록 두려워도,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있는 것을 떠올려 보라. 재산이어도 좋고, 추억이어도 좋다. 행복을 빌미 삼아 살아가라. 이유는 없다. 처자식을 잃은 주인공이 이유를 부여하며 구차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갔다. 함께 죽으리라는 머저리 같은 생각 대신 악착같이 어머니를 뫼시며 살아갔다. 어머니를 잃어도, 요리사로서 살아갔다. 그렇게 더 나은 인생을 향해 달리자.


맨 처음에 말했던 ‘답‘은 사람이자 행복이다. 사람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하기에 사람이 몰려드니, 두 가지 보기 중 어떤 걸 골라도 답이 된다.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행복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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