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라 추앙받던 이상의 소설에서 둔재를 엿보다
당신은 둔재로 살아 보았는가? 무언가에서 평균 이하의 성적을 이룩하는 일을 결코 겪어본 적이 없던가?
나는 인간관계도 공부도 심지어는 예체능도 전부 잘하지 못했다.
무언가의 부문에서 둔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남들보다 배의 노력이 필요함에도, 나는 노력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부분에서 정진했을 뿐이었다. 매우 나쁜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생으로서의 의무를 짊어지지 않은 셈이니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 때까지가 유쾌하오.
나와는 정 반대인 천재가 집필한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쉽사리 포기하곤 한다. 패배자로서 살고 있었다. <날개> 속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을, 능력을 내보이지 않고 웅크려 사는 번데기. 아직 변태 하지 않은 그런 번데기였다. 모든 걸 외면하고 눈감아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머리가 있다면 아내가 몸을 판다는 사실도, 그렇게 해서 자신을 먹여 살리고 쉰 밥이라도 먹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아내의 외출에서 아내를 그리워하지만, 아내의 사소한 행동에서도 아내의 행복을 바라지마는 그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다.
외출로 인해 감기에 걸린 나머지 아내가 준 감기약을 먹고 그것이 수면제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분노를 느낀 것은, 아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짐덩어리로 본다는 사실에 대한 회피가 더 이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더 이상 나약하게 살 수 없었다. 아내의 사랑은 없고, 주변인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는 날아올라야만 했다. 더 이상 웅크리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 그는 점점 그의 세상을 깨부수고 있었다.
데미안 중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이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 새는 신에게로 날아가려 한다 ‘가 아니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부분일 것이다.
주인공은 ‘새’였던 것이다. 마지막에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부분에서 확실시된다.
사실 이상은 모더니스트이고, 이 해석이 모더니즘에 기반한 것은 아니지만, 이상은 단일적인 해석만을 지향할 것 같진 않다.
나도 번데기가 아닐까? 언젠가는 번데기를 뚫고 나와 변태하여 나비로서 짧고 굵은 삶을 살지는 않을까? 이 자그마한 희망의 편린이 나를 살게 해 주고, 인간을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만큼 희망은 둔재에게는 잔혹하다. <날개>에서도 주인공이 희망을 가지고 ’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희망을 가진 부분에서 끝낸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이 실현될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에게 달려 있다. 여기서 희망을 얻되 안주하지 마라.’라는 말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닌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