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존슨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세상은 변수투성이다. 내 예상을 빗나가기도 하고, 예상을 비웃듯이 전혀 반대로 흘러가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일에 불이익을 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난관에 처한 상황도 있을 것이다.
스펜서 존슨은 그런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다.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 실험‘의 개와 같다. 한 번 각인시켜준 규칙이 어긋날 리 없다고 멋대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이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에서 잘 드러나 있다.
두 마리의 생쥐, 스니프와 스커리와 두 명의 꼬마 헴과 허가 있었다. 두 꼬마와 두 생쥐는 미로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미로 속에서 치즈를 찾아다니며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이 책에서의 ‘미로’와 ’치즈’는 일종의 상징물로서 활용된다. 미로는 ‘변수 투성이의 삶’이고, 치즈는 ‘행복과 풍요‘ 따위의 것을 상징한다.
생쥐와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달랐다. 생쥐는 갉아먹기 좋은 딱딱한 치즈를, 사람은 C라는 치즈를 찾고 있었다. 목적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이성과 경험이 녹아있는 삶의 동기였다.
어찌저찌 헴과 허, 스니프와 스커리가 치즈공장 C를 찾아냈다. 스니프와 스커리는 빼앗길 것을 생각하여 항상 치즈공장에 빨리 달려갔다. 헴과 허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점차 여유로워졌다.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굴었다. 친구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며 아량을 베풀 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하루였다. C치즈공장의 치즈가 전부 사라졌다. 스니프와 스커리는 좋은 직관력으로 그 상황을 예측해냈던 것이었다. 그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나아갈 뿐이었다. 새로운 치즈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반면 헴과 허는 그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C치즈공장의 치즈는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생쥐들과는 달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초점을 옮겼다.
상황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 믿은 것은 오만이고 허황이었다. 상황은 이미 변화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나아갈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헴과 허에게는 사라진 치즈가 스트레스였다. ‘또’ 찾아나서야 한다는 점에서 피곤함을 느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더욱 당황했던 것도 있었다.
헴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동안 그들은 굶주려야만 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이다. 하지만, 허는 다시금 일어섰다. 헴은 C치즈공장에 남기로 했다. 허도 헴도 사실은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 미로 속에 대체 무엇이 존재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다녔던 길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길목으로, 그는 발을 내디뎠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자, 몸이 가벼웠다. 허는 돌아다니며 치즈를 구했다. 또 헴에게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헴은 거절했다. 실패의 추억은 쓰라렸다.
허는 헴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친구가 그리웠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렇게 나아갔다.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계속 불평만 하고, 구세주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상황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허의 생각이었다.
‘작은 변화에도 민첩하게 대응한다면 큰 변화를 알아차리기 쉽다.‘
허는 여태까지 벽에 글귀를 적었다. 위의 말도 그중 하나였다. 마지막까지 헴이 일어서길 바란 친구의 마음이었다.
허는 교훈을 얻었다. 절망에 웅크리고 있다면 절대로 나아갈 수 없고, 작은 변화에도 잘 알아차려야 하며, 주변을 간단하고 융통성 있게 유지하며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헴과 같을 수도 있고, 허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변화에도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변화조차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한 걸음 더 진보한 어제보다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