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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Jul 07. 2022

못된 선물

- 못되지 않은 선물로 변신 준비 완료()._.()-


여느 때처럼 자정 넘어 퇴근하고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던 날이었다. 7살이던 첫째 아이가 새벽에 눈을 비비며 내 곁에 와서 말했다.


"어른되는 게 엄마같이 사는 거면 난 어른되기 싫어."


그 짧은 문장을 듣는 순간, 바쁘게 놀리던 손이 멈췄고 가슴이 퍽 쓰라렸다. 전날에도 자정 넘어 퇴근하는 바람에 아이들 얼굴도 못 보고 옷도 못 갈아입고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잔 터라, 하필 그때 내 모습도, 집 안의 모습도 엉망이었다.


내가 용기 내어 물었다.

"왜?"

아이가 대답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고 시간은 하나도 없고! 어른이 그런 거면 난 어른 절대 안 할 거야! 

엄마처럼 살기 싫어!"


그때 난 엄마에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을 내뱉던 순간 도로 주워 담고 싶었던 말,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던 말, 하고 나서 후회했던 그 말.




결혼할 즈음 참 몸이 안 좋았다. 엄마는 서울에 떨어져 살면서 아픈 나 때문에 늘 조마조마하다고 는데 이제 속이 다 시원하다며 오랜 반대 끝에 결혼을 승낙하셨다. 이런저런 말이 오고 가다 내가 말했다.


"난 아이 안 가질 거야. 사는 거 너무 힘들잖아. 이런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아이에게 고통스러운 삶 자체를 주지 않을 거야."


자식이 이런 말을 할 때 부모는 어떤 심정일까?

엄마는 조용히 먼 곳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다 너같이 사는 건 아니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땐 그 사람과 꼭 닮은 아이를 선물해 주고 싶기도 하지."


나의 아빠와 엄마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엄마가 그렇게 말하시니 꽤 놀랐다. 그렇다고 해도 그 마지막 문장은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이다. 그럴 거면서 저런 말을 했던. 참 못됐다.


그런 내가 부모님께 과연 선물 같은 존재였을까?




초등학교 3학년 즈음, 동네 치과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무슨 일인지 간호사에게 다시 찍어오라고 하여 3번을 찍었다. 그러고는 안 되겠다며 본인이 직접 엑스레이 찍어주었다. 간호사 언니들이 나 때문에 혼나는 그 상황이 조마조마해서 기억이 난다. 그러더니 의사가 혼자 턱수염을 만지며 한참 나를 앞에 두고 사진들을 보다 말했다.


"영구치가 잘 내려오고 있나 보려고 찍어 보았던 것인데, 보시다시피 입천장 깊숙한 곳에 커다란 앞니 2개가 더 있어요. 책에서는 본 적 있는데 실제로는 처음 봅니다. 그런데 위치가 안 좋네요."


그날 이후로 주말마다 울산에서 유명하다는 치과는 다 다녀본 것 같다.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런 케이스를 실제로 다뤄본 적은 없습니다.", "가 수술하기엔 너무 위험한 곳에 있어.",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마지막 말은 세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린 나에게도 충격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나를 앞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고 늘 엄마와 의사 둘만 길게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저런 종류의 말들은 멀리서도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그래도 충격적이었을 뿐, 다른 특별한 느낌 없었다. 그 의미가 어렸던 나에게는 친절하게 해석되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냥 이, 의사, 치과 등은 떠올리기 싫은 느낌, 딱 그 정도였을 뿐.



일 년에 몇 번입천장부터 머리가 미칠 듯이 아팠다. 스치기만 해도 아파 절로 소리치게 될 정도였으니 물조차 마실 수 없었고 혀만 닿아도 아파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프다고 하면 치과에 또 가야 할 것이므로 난 그때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종일 방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 하루 꽁꽁 앓고 나면 고통이 사그라들었. 그렇게 아프고 나면 조금 걱정이 되었고. 무슨 큰 병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그 아픔이 찾아올까 봐 두렵기도 하고, 이것보다 더 아파질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어리석게도 치과에 가는 게 너무 두렵고 싫어서 아무리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저 치과에 가야 할 빌미를 만들지 않으려고 열심히 이를 닦았다. 그것이 지금도 내가 충치가 전혀 없는 이유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적 아니 과거의 기억이 많지 않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탓일 테지만, 특히 좋았던 기억은 부재하다. 분명히 있었을 텐데. 별일 아닐 수도 있었던 좋지 못한 기억들을 내가 크게 부풀려 좋은 기억을 다 삼켜버리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그중 그 무렵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엄마는 낮에 라디오를 종종 들으셨는데 의사들을 초빙해 전화상담을 해주는 코너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기를 들고 한 치과의사와 연결되어 나에 관한 상담을 하고 끊으시고는 한참을 무릎을 안고 펑펑 소리 내어 우셨다.


분명 꾹꾹 눌러 담은 울음소리였지만 내 마음엔 거대한 북소리처럼 크게, 그 슬픔의 울림까지 고대로 전해졌고, 나는 내 방 가장 먼 구석에 숨어 똑같이 쪼그려 앉아 울었다. 나 때문에 우는 엄마를 달랠 수가 없었다. 달랠 용기가 없었다.


엄마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슬펐을게다. 아무 이유 없이 딸에게 미안했으며 흘러넘치는 슬픔을 숨기고 위로해 줄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슬펐지만, 그렇지 않은 은밀하게 감추며 살아왔다.


나는 부모님에게 과연 선물 같은 존재였을까? 난 언제나 나 자신이 그냥 커다랗고 치울 수도 없는 짐짝처럼 느껴졌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더 우울하고 지쳐버린 것 같은.




그렇게 한동안 생에 치여 잊고 살아갔다. 수능이 끝나고 엄마는 대학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다. 엑스레이를 찍고 나니 의사가 회의가 필요할 것 같다며 일주일 뒤에 얘기하자고 하셨다. 그 일주일은 '왜 회의가 필요할까?'라는 생각만 했다. 여하튼 공포의 일주일이 끝나고 손을 바들바들 떨며 긴장해 갔던 기억이 난다. 치과에 다가갈수록 진해지는 치과의 향기는 정말 공포의 서막 같았다.


짤막한 몇몇 대화들만 기억난다. 현재 얼굴 가운데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 치과, 이비인후과, 성형외과, 마취과 등의 협진 하에 수술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수술 중 사망확률이나 수술 없이 그냥 살다가 죽을 확률이나 비슷하니, 자신의 딸이라 생각하면 굳이 수술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그때 난 수술하지 않는다는 말에 크게 안도했고, 아마 미소를 지었겠지.


잠시 후, 의사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수술 안 해서 좋아?

 이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 말은 안도감으로 보들보들해진 내 마음을 순식간에 어디론가로 멀리, 영원히 쫓아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사는 내게 일 년에 한 번씩 반드시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조금 무섭게 하려던 장난스러운 말이었던 듯싶다.

다만 그 장난이 내겐 전혀 통하지 않았을 뿐.


그렇게 조금은 어릴 적부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후회 없도록 묵묵히 열심히 살았고, 나쁜 말을 하거나 나쁜 행동을 하고 바로잡못하거나 후회하며 죽는 일이 없도록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지금껏 부모님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한 번도 욕설이나 화를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여하튼 난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느 부모님의 아이처럼 과연 선물 같은 존재였을까? 


나의 기억 속에 부모님의 웃는 얼굴은 없다. 언제나 눈물이 가득한 엄마의 눈과 슬픔에 목이 멘 목소리, 표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듯한 아빠의 고단한 얼굴, 우리 모두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던 고요한 식탁. 그저  아주 못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기대해 줘요.
이 고약했던 선물이
이제 향기로운 선물이 되어볼 테니!
아주 조금만 기다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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