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it began
I can’t begin to know when
But then I know it’s growing strong
Was in the spring
And spring became the summer
Who’d have believed you’d come along
...(하략)...
존 F. 케네디의 딸 Caroline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곳이며,
Caroline의 한 생일 축하 공연에서 그녀를 위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는
시대를 초월한 가수이자 뛰어난 작곡자 Neil Diamond(1941~ )
7회 말이 끝나면 나오기 시작하는 닐 다이아몬드의 Sweet Caroline!
경기가 이길 것 같거나 기분이 좋을 때 7회에서 9회 사이에서 종종 틀었던 것이
팬들의 입에서 흥얼거려지게 되었고
이후 공식적으로 7회기가 끝나면 나온다는 음악.
지금은 MLB(Major League Baseball, 미국과 캐나다에서 최고 수준의 프로 야구 리그)의 프로야구단,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의 응원가
good times never seemed so good 이후 잠시 정적, 음악이 멈추면
관중석에 있는 팬들이 다 함께
so good
so good
so good
길거리 응원 문화가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된 2002년 응원 구호 “대~한 민국, 짝짝짝 짝짝!”
아이돌 공연 문화의 하나인 응원봉 들고 떼창 등은
모두가 하나 되어
강력한 집단 에너지를 발휘하는 현장이지요.
거대한 역동이 일어나는 곳이고요.
'뉴잉글랜드의 수도‘ 또는 ’ 미국의 아테네‘ 와 같은 별명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 최초로 건설된
도시, 보스턴에 기항하는 오늘입니다. 캐나다 동부 항구 시드니와 핼리팩스를 거쳐 미국으로 내려와 바 하버를 지나 보스턴에 도착했습니다.
보스턴은 영국 청교도들이 자유를 찾아 뿌리를 내린 땅이지요. 1773년의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독립의 길을 걸었습니다. 영국의 과도한 세금 정책에 반대해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싣고 온 중국산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지요. 이 사건은 미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보스턴 미술관과 공공도서관, 하버드 대학을 가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은 미술관(Boston Fine Art Museum, MFA)에서의 시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고대 예술부터, 아시아(한국관 포함), 유럽회화, 미국, 현대 예술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회화, 가구, 조각, 링컨 동상 등 방대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보스턴 미술관은 세계에서 20번째로 큰 미술관으로,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빈센트 반 고흐,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고갱, 폴 세잔, 렘브란트, 존 싱어 사전트 등 8천 여점의 그림과 45만 점 이상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1870년 지방 유지에 의해 설립되고,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이 되던 때 개관했다고 합니다. 한국관을 비롯해 동아시아 주요 3국의 전시관을 두고 있습니다.
미국 대표 미술관 중의 하나로 규모도 대단하고 미로 같은 구조를 찾아가는 시간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편안한 옷차림과 신발을 착용하고 갔습니다.
줄을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소곳 1 부부‘가 우리 앞에 서 있네요.
크루즈 승객 중에 일본인이 12명이 탑승하고 있는데, 나고야에서 온 ’다소곳 1 부부‘는 전형적인 일본인 느낌이 있습니다. 규칙적인 식사 시간과 뷔페식당에서도 거의 고정적인 자리에서,
말 없고 조용히 늘 같은 메뉴로 먹는 그들과 달리, 일본인 중에 ’ Sea Shoz 시쇼부부‘는 매우 활발하고 적극적이어 초반부터 우리와 친밀해졌습니다. 남편인 쇼상은 한국회사의 도쿄 지사에서 7년여 근무해서 한국어도 제법 잘합니다.
우리를 만나면 가능하면 한국어로 말을 거는 쇼상, 크루즈 후반에는 저보고 일본어도 공부하라고
제안하더군요. 2025년 봄에 한국 방문할 계획이 있다고 하면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쇼상이 전해주는 말로는 '다소곳 1 부부'는 둘 다 고위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은퇴를 했고
이렇게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2026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하는 프린세스의 월드크루즈도 예약했다고 합니다.
그들 부부는 마주쳐도 눈인사도 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 움직이곤 하였는데, 코펜하겐 미술관에서 만나 처음으로 'Hello' 한 마디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와 같은 일정일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정면에서 마주치지 않는 한 인사를 안 하는 그들의 극내향형 성격을 알기에 모른 척했습니다.
'다소곳 1 부부'가 있으니 그다음 '다소곳 2 부부'도 있겠지요.
그야말로 전형적인 일본 노인 태도로 걷는,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숙여 빼고 시선은 아래로, 어깨는 둥글게 말고, 허리는 뒤로 뺀 자세로 천천히 걷고, 그 뒤 한 발자국 뒤에서 부인은 종종걸음으로 보폭을 맞추는 부부. '시쇼부부' 때문에 서로 얼굴을 알 뿐만 아니라 저녁 정찬 시간도 같은 식당의 가까운 테이블이어 거의 매일 저녁 만나는데도 그 부인은 그때그때 아는 척 인사하다가 모른 척하다가 종 잡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부인은 저를 미워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쇼상의 전언에 의하면, 그 남편은 은행원으로 은퇴를 하고 식사 때만 방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 시간에는 방에서 책만 읽는다고 합니다.
'다소곳 1 부부'는 우리를 비롯해 다른 승객들에게 매우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그들 일본인들끼리의 모임에는 제법 대화도 하고 밝게 웃기도 합니다. 종종 일본인 승객들은 같이 모여 식사를 함께 하거나 바에서 술 한잔을 하면서 모임을 갖곤 하는데, 조금 부러웠습니다. 우리도 같은 한국인 승객들이 있다면 편안하게 우리말로 대화도 하고 일정이 맞는다면 기항지 관광도 같이 할 수 있는데 혹시라도 한국인 승객이 탑승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개인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한국인 승객 탑승 여부는 알려줄 수 없다고 고객 센터 직원이 응답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혹시나~ 한국인? 하면서 동양인이 보이면 찾아보는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치코상'을 만났습니다. 빨간색 풀오버에 청바지를 입고 단발 파마를 한 그녀를 한국인으로 보고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으면서, 또 동시에 그녀는 저에게 일본인이냐고 물으면서 웃기 시작했지요. 오가며 인사를 하고, 시간이 가능하면 대화를 나누었지요. 영국인 남편은 7년 전에 세상을 뜨고 지금은 시드니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자녀가 없다고 합니다. 저보다 12살이 많은데 저는 또래 친구로 생각했었답니다. 표정과 생각이 젊습니다. 일본에 사는 조카며느리와 조카며느리의 친구가 함께 승선하여 세 명이 함께 월드 크루즈를 즐기고 있습니다. 동행이 있지만 종종 혼자서도 자율적으로 움직입니다. 식사도 혼자 할 때도 있고, 키웨스트 기항지 내렸을 때는 혼자서 나비 보러 간다고 하는 그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시드니에서의 일상은 아침에는 뉴스를 보고 피아노 교습을 받고 오후에는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남편과 춤을 즐기는 우리를 보면서 부러워했지요. 남편 생전에 함께 크루즈를 즐겼고, 볼룸댄스 경연에 참가해서 1등을 하기도 했다며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합니다. 여행은 끝났지만 가끔 그녀를 생각합니다. 밝은 색상의 옷차림, 웃는 모습, 그녀가 늘 건안하면 좋겠습니다.
8년 전 지중해 크루즈에서 한국인 승무원을 만났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서양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다가가서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었었지요. 다행히 그녀를 이번 월드 크루즈에서 다시 만나 4 개월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는 당당히 한국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을 알 수 있어 자긍심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만났을 때만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요.
다행히 하선 한 달을 앞둔 시점에 한국인 부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해진 웨이터가 좋은 한국인이 있다고 알려줘서 짐작이 되는 동양인한테 다가가 한국인인지 물었거든요. 시드니에 사시는 교포셨어요. 80년대 초에 호주로 이민을 가셔서, 지금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셨지요. 다행입니다.
크루즈 터미널에서 미술관까지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우리가 이용한 라인의 보스턴지하철 역은 어둡고 환승 통로는 비좁고, 냄새도 나고, 환풍과 냉방 장치가 우리네 70년대와 비슷했어요. 깨끗하고 밝고 쾌적한 우리의 지하철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이 뿜뿜 저절로 올라오더군요.
잘 다듬어진 파란 잔디 정원이 웅장한 미술관 건물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린 자세로 말을 타고 있는 청동 인디언 동상이 먼저 우리를 반깁니다. ’ 한류전‘이 특별전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특별전을 관람하지 않겠냐고 긴 머리를 야무지게 레게 매듭으로 따고 목과 손에 문신을 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티켓 부스의 청년이 묻습니다. “한류의 본거지인 한국에서 왔다고. 오늘은 보스턴미술관의 상설 전에 집중하겠다”라고 웃으며 대답했지요. 보스턴 미술관은 3월 24일부터 7월 28일까지 ’ 한류! 코리안 웨이브(Hallyu! The Korean Wave)란 이름의 전시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함경아 작가 등 현대미술 작품도 전시되지만, 전시회의 근간은 K팝과 K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입니다. 관객들은 한국 패션디자이너의 의상과 영화 소품, 포스터 등 250점의 전시물품을 접하게 되지요. 한류 특별전은 청소년들 관람객이 많아 보였습니다.
1층에서 2층 유럽관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양 쪽 끝에는 각국에서 온 항아리와 향로들이 마치 근위대처럼 정렬해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합니다. 빨리 만나고 싶은 설렘으로요.
유럽 화가들의 그림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보스턴 미술관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방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네의 많은 작품들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게 전시되어 있어, 감동이 더 커진 모네방에는 크기도 다른 그림의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키모노를 입고 있는 카미유> 그림의 경우 저는 불편하고 거북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각광받고 있는 자포니즘의 열풍 탓이라고 감안하더라도.
만일 한복을 입고 있는 카미유라면?... 반가웠겠지요.
당시 모네가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그린 그림으로, 돈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예술정신을 팔아넘겼다는 자책과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니 이해가 되긴 합니다.
루앙성당, 포플러 나무, 건초 더미, 수련 등의 연작 작품과 풍경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모네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프랑스 회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인상파 운동의 선두주자로서, 그는 자연 세계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빛과 대기의 순간적인 효과를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보스턴 미술관은 1906년에 최초의 모네 작품을 확보하였고, 지금은 38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외부에서 가장 큰 모네 컬렉션 중 하나라고 미술관은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의 다양한 생동감 있는 붓질은 색을 통한 대기와 깊이의 표현을 드러냅니다. 그의 유동적이고 표현적인 붓질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과 결합되어, 이 작품들을 정의하는 빛이 가득하고 생동감 넘치는 자연 묘사를 만들어냅니다. 1860년대 초, 일본 미술, 직물 및 장식품이 유럽에 확산되었습니다. 모네는 상당량의 일본 목판화(우키요에)를 수집했으며, 1890년대에는 지베르니 마을의 집에 일본식 수련 정원을 조성했습니다.
모네는 1864년부터 동일한 주제, 관점 또는 모티프에 대한 여러 그림을 만드는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20개 이상의 그림으로 구성되기도 했으며, 개별 캔버스는 주어진 주제를 다양한 시간대, 변화하는 날씨 조건 또는 다른 계절에서 묘사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주제 자체는 사소한 요소이다. 내가 재현하고 싶은 것은 주제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에 덜 관심이 있었던 모네의 미세한 비전은 다양한 시각적 조건에서 경험한 순간적 감각을 추구했습니다. 건초더미 시리즈는 이 연속 형식으로 그린 그의 초기 탐구 중 하나였으며, 그의 후반부 수련 작품들은 경력 말기까지 점점 더 추상적인 구성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연작 작품들은 그의 대리인 폴 듀랑-뤼엘에 의해 파리에서 전시되어 비평가들의 찬사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명작 중 화가가 살아 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했던 작품을 대하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대표적인 화가가 되겠지요. 명작 중 화가가 살아 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했던 작품을 대하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대표적인 화가가 되겠지요.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에 모여드는 전 세계 관람객들은 고흐의 <귀 잘린 자화상> 앞에서 입을 닫고 오래 지켜본다고 합니다. 칼로 자기 귀를 잘라내고 붕대를 칭칭 감고 그린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깊은 고뇌와 자신과의 불화를 견뎌내지 못했던 그 순간이 찰나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분명 예술은 시간을 관통하는 감동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니어도 내일의 그들은 추앙받고 그들의 작품은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덥수룩하고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는 <집배원 조제프 룰랭의 초상>을 비롯한 반 고흐 작품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애주가였던 룰랭이 또 한잔을 했는지 양 볼이 불콰합니다. 친절하고 호탕한 룰랭과 그의 가족들에게 위로와 지지를 받은 반 고흐는 그들을 ‘다정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그의 가족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집배원 조제프 룰랭의 초상>, 1888
빈센트 반 고흐가 룰랭을 모델로 그린 6점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실제 나이보다 (당시 47세) 더 나이 들어 보이는데 더운 여름에 정복을 입고 모자까지 썼으니 모델 역할도 고역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어거스틴 롤랭 부인의요람 흔들기>, 1889,
폴 고갱(1848~1903)의 그림을 알기 전에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 먼저 만났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던 소설책 <달과 6펜스>.
폴 고갱의 삶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소설 속 인물인 영국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지요. 물론 소설은 고갱의 삶을 근간으로 만들어졌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고갱이기보다 그림을 열망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겠지요.
안타깝게도 살아생전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폴 고갱.
고갱은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 도착한 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파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1895년에 타히티로 갔습니다. 예술적 성장을 이루고 저렴하게 살기 위해 찾아온 타히티에서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열대 낙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맞부딪힌 현실은 불편한 현대성이며, 프랑스 식민 당국과의 갈등, 경제적 어려움, 급격한 정신적, 신체적 건강 상태도 나쁜 시기에 내놓은 작품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1898, 보스턴 미술관 소장>입니다. 그의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374.6cm x 139.1cm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이 그림이 “벽화처럼 보이길” 원했고, 단순한 흰색 액자에 전시될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전시 당시 비평가는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운명의 신비에 대해 명상하게 한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인간의 기원, 정체성, 운명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저를 포함한 관람객들에게 숙제로 다가오며 울림을 전하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피에르 샤반느의 그림 <예술과 자연 사이, Between Art and Nature, 1890,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의 구도, 배경, 인물들의 배치 등이 비슷하여 피에르 샤반느의 작품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897-1898
자살을 고민하며 그는 이 그림에서 삶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했다고 합니다. 그의 편지에서는 이 구성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히도록" 의도했다고 밝혔습니다. 시작은 잠자는 유아로, 중앙의 서 있는 젊은이에서 절정에 이르고, 죽음에 가까운 여자의 쭈그리고 앉은 모습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그림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세 가지 질문은 제목 자체에 포함되어 있으며, 화가가 왼쪽 상단 모서리에 프랑스어로 썼습니다. 파리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본 관람객들은 장면을 해석하는 방법과 그것을 알레고리로 읽어야 할지 궁금해했다고합니다. 1936년 보스턴 미술관(MFA)이 이 그림을 구입했을 때, 지역 신문은 박물관이 이러한 검증되지 않은 현대 미술을 수용하는 것이 옳은지, 그리고 이 그림이 전시될 것인지 아니면 저장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오늘날 이 그림은 고갱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지만...
르누아르는 1860년대에 모네와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그들은 작품이 공식 전시에서 거부당한 것에 대해 실망을 공유했습니다. 시슬리와 피사로와 같은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이들은 독립적으로 전시하기로 결정하여 지금은 인상파 전시로 알려진 최초의 전시회를 1874년에 개최했습니다. 르누아르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은 지역 풍경, 자연광, 그리고 보다 즉각적이고 세밀하지 않은 붓질로 개성 있는 화풍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부드럽고 가벼운 붓질은 그가 가장 잘 알려진 풍경화와 여가 장면에 우아함과 섬세한 에너지를 더합니다. 이 풍경들 그룹은 그의 작품의 전형을 보여주며, 파리 외곽과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같은 장소의 풍경을 포함합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부지발에서의 춤>, 1883
파리 외곽의 센 강가에 위치한 부지발의 야외 카페는 도시 거주자들, 특히 인상파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여가 장소였습니다. 여기 한 카페에서, 바닥에는 담배와 꽃이 흩어져 있고, 한 아마추어 보트맨이 밀짚 모자를 쓰고 스타일리시한 파트너와 함께 왈츠를 추고 있습니다. 그들의 맨손의 접촉과 여성의 살짝 내려다보는 시선과 발그레하게 물든 볼의 홍조는 그녀가 감추기 어려운 설렘과 기쁨을 느끼고 있으며 이 장면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전해줍니다. 르누아르는 "나는 꾸밈없는 그림이 좋고, 영원을 간직한 그림이 좋다"고 말했듯이, 이 작품 속 두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고, 무도회에서의 젊음과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 보입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저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춤추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감정과 순간을 포착해 내는 작품으로, 그들의 기쁨, 젊음, 그리고 사랑은 화면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르누아르는 그 순간의 감동을 부드러운 색채와 유려한 선으로 담아내며, 우리가 그 장면 속에서 잠시라도 함께 춤추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는 1882년에서 1883년 사이에 춤을 주제로 한 세 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중 <시골에서의 춤>(Dance in the Country)과 <도시에서의 춤>(Dance in the City)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부주발에서의 춤>(Dance at Bougival)은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도시에서의 춤>에서는 주인공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고요한 정경으로 그려지며, 인물들의 뒷모습이 강조됩니다. 반면 <시골에서의 춤>에서는 사람들이 모자를 벗어 바닥에 두고, 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기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두 작품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시에서의 춤>은 차분하고 정갈한 무도회장을 배경으로 하여, 깔끔한 바닥과 따뜻하고 밝은 색감이 두드러집니다. 그에 비해 <시골에서의 춤>은 보다 친근하고 여유로운 춤의 자세를 그리며, 밝고 환한 미소를 가진 인물들의 얼굴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대비를 이루고 있지요. 두 작품은 복장, 배경, 자세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의 춤>에서는 남녀의 표정이 가려져 있어 그들의 감정을 알 수 없고, 세련되게 차려입은 모습만이 드러나보이지만, <시골에서의 춤>에서는 인물들의 표정이 드러나며,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옵니다.
르누아르,<시골에서의 춤>, 1883, 오르세미술관 <도시에서의 춤>, 1883, 오르세미술관
“춤추기는 짜릿한 느낌이다.
춤추기는 파트너와 댄스 홀,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거의 매번 달라지는 신세계.
춤추기는 제의식일 수도 있고, 운동, 예술, 직업. 정열의 대상 혹은 치료법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에 앞서 감정의 표출이다.
춤을 추는 행위는 인간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의 뇌는 춤을 추고 싶어 한다”라고
장동선은 그의 책에서 말했습니다.
"춤은 영혼의 숨겨진 언어이며, 말로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미국의 무용가였던 마사 그레이엄을 말했습니다. 심지어 "발로 쓰는 시(詩)"라고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댄스스포츠를 배워왔습니다. 댄스스포츠는 음악이 갖고 있는 리듬과 분위기를 동작으로 표현하는 신체와 공간을 이용한 행위로, 남과 여 두 사람이 커플이 되어 추는 춤으로 바닥이 매끄러운 나무로 되어 있는 넓은 홀(Ballroom)에서 주로 추기 때문에 Ballroom Dance라고도 합니다. 모던댄스와 라틴 댄스를 배우고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변형된 블루스와 지터박도 배웠고요. 60년대와 70년대 그 당시 풍기 문란이라면서 단속이 심했던 시절에는 좁은 곳에서 몰래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작은 동작의 춤으로 바뀌어지고 우리의 가요나 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다가 지금의 형태로 춤이 된 것은 블루스와 지터박인데 이것은 일명 Korean Dance 혹은 사교댄스로 불리다가 요즘은 시대적인 추세에 맞추어 웰빙댄스로도 불립니다. 요즘은 건강 관리 차원에서도 댄스스포츠가 매우 많이 대중화되어 있고, 문화센터나 스포츠센터에서 인기 있는 과목의 하나가 되었지만, 남녀가 밀착하여 추는 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춤과 몸, 정신 건강, 혹은 노화에 대한 적응에 관한 연구들은 이 분야의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그중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노화연구소 연구팀의 8년간 추적 관찰 결과에서는 "춤은 균형 능력, 힘, 지구력뿐만 아니라 인지 능력도 필요하다"라며 "음악과 파트너에 따라 움직이는 적응력과 집중력, 우아한 동작을 위한 예술성, 안무를 기억하는 능력이 요구된다"라고 밝혔습니다.
‘노년기에는 춤만 한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 부부의 결론입니다.
그나저나 무릎은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살짝 걱정이 되긴 합니다.
그래도 춤을 추는 순간의 기쁨과 활력을 생각하면 그 어떤 불안도 사라질 것 같다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기도 한 르누아르는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모네, 바지유, 시슬레 등을 만나게 되었지요. 빛과 그림자의 어울림을 살려 인물의 표정과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으며, 밝고 화사한 색조로 인물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따뜻하고 온화한 감정을 전달했습니다.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손가락 관절이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작업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고, 손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그림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었으며, 보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줍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햇빛이 든 언덕의 양산을 든 여인과 어린아이>, 1874-1876년경
이 그림의 모델은 아마도 동료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아내인 카미유 모네일 것입니다. 르누아르는 1874년부터 1876년까지 그녀를 여러 번 그렸습니다. 여기 그녀는 언덕에 앉아 있으며, 그녀의 흰 드레스는 그늘에서 분홍색과 파란색의 점들이 연기처럼 흐르듯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우아함과 조용함은 오른쪽 캔버스 위로 나아가는 아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그 아기는 화가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자신만의 움직임으로 자유롭습니다.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 <노예선/ 죽어가는 자들을 바다에 던지기, 태풍이 다가온다>, 1840
처음 보기에는 눈부신 석양이 이 그림의 전경에 있는 혼란과 공포를 가립니다. 긴 제목은 1781년의 노예선 조치 사건을 암시합니다. 선원의 부대는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해 132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바다에 던져 죽였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에서의 노예 폐지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영국 제국에서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노예제가 존재했습니다. 그는 1840년 봄에 이 그림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했으며, 이 전시와 겹쳐서 런던에서 첫 번째 세계 반노예 회의가 열렸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을 지나 드디어 이 그림을 보게 되니 인간 속성 중 하나인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회화들을 보고 나서,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40~1924)의 방으로 가는 길이 매우 복잡해 안내 데스크에 있는 안드레아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들어 천정화를 보라고 하더군요. 사전트가 죽기 전에 완성한 마지막 장식 작품이라고 합니다.
Sargent는 1916년 11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보스턴 미술관의 대형 계단과 원형 홀 벽화 컬렉션을 작업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인물과 우화적인 주제를 설명하여 미술의 수호자로서의 박물관의 역할을 강조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안내 데스크에 근무하는 안드레아의 도움으로 복잡한 통로를 거쳐 존 싱어 사전트의 방으로 갔어요. 가는 길에 안드레아가 “서울은 깨끗한가?”라고 묻는 거예요.
보스턴 지하철보다 더 쾌적하고 안전하고 깨끗한 우리의 지하철이 있는데...
서울은 깨끗하고 안전하고 잘 조직되었다고 했지요.
그녀의 첫 남편이 한국전 참전 용사였다는군요.
이해가 되었어요. 70년 전 전쟁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면 깨끗한 상황인지가 궁금했겠지요.
어릴 적 미군이 먼지를 휘날리며 신작로 자갈길을 달려가면 어린 남자애들이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고 그걸 보면서 낄낄 웃으며 초콜릿을 길 위로 던져주던 미군들이 생각났습니다.
안드레아 그녀는 자신이 근무하는 미술관에서 “한류 전”이 특별전으로 진행되는 것을 무심히 받아들인 것인지 씁쓸했습니다.
존 싱어 사전트,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1882, 보스턴 미술관
사전트의 방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1882> 그림입니다. 작품의 크기가 약 222.5cm x 222.5cm 대형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으로 가족의 심리적 분위기와 개성을 포착하여 표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림 속에 있는 두 개의 큰 일본식 화병도 인상적이며 보스턴 미술관은 그림 앞에 청화 도자기 꽃병을 양 옆에 배치해 놓아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림 보다 도자기 화병이 먼저 눈에 띄어 그림에게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듯 느꼈습니다.
화병들은 공간의 분할과 균형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가정 내에서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속에서 딸들은 어둡고 넓은 방의 캔버스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서로 다른 신체적, 정서적 공간을 차지합니다. 이는 초연함과 성찰의 느낌을 만들어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사적인 순간에 침입한 관찰자가 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Sargent는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각 인물의 고립감을 강조합니다. 두 명의 큰 딸은 부분적으로 그림자에 싸인 채 더 멀리 서 있고, 전경에 있는 인형을 안고 있는 막내딸은 조명을 받아 그녀의 순수함과 연약함을 강조합니다. 이들 자매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뒤편의 두 자매는 말년에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합니다. 사전트는 이 그림으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는 뛰어난 초상화 기술과 생동감 넘치고 섬세한 스타일로 유명한 미국 화가로, 유럽 학문 전통과 떠오르는 인상파 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Sargent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의사인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명한 초상화 예술가 Carolus-Duran 밑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전트는 유럽에서 미술 활동이 자신의 예술세계에 확실한 앞날을 보장한다고 믿었답니다. Sargent는 파리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도발적인 <Madame X, 메트로풀리탄박물관 소장>(1884)가 파리 살롱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여성 초상화의 보수적인 관습에 도전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파리에 거주하는 미국인 사교계 명사인 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의 이 전신 초상화는 Sargent의 능숙한 붓놀림, 빛과 그림자에 대한 그의 예리한 이해, 복잡한 성격을 포착하는 그의 재능을 잘 보여줍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이 작품의 크기는 약 208.6 x 109.9cm(82 x 43인치)이며 도발적인 우아함으로 유명합니다.
마담 x 그림 앞에 서 있는 존 싱어 사전트
오호라, 다음에는 저도 그림 속의 주인공과 같은 포즈로 사진 한 장 남겨볼까봐요....
논란으로 인해 그는 한동안 영국으로 물러났지만, 그의 초상화는 부유한 미국과 유럽의 후원자들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주의와 깊이를 물씬 풍기며 초상화 의뢰에 대한 높은 수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1886,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꽃이 활짝 핀 초저녁 정원에서 두 아이들이 종이 등에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1886, 테이트브리튼 미술관>는 사전트가 다시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짙은 초록색 정원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고개를 숙이며 종이 등에 불을 밝히는 모습의 소녀들은 사전트 친구의 딸들입니다. 황혼의 빛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싶은 사전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야외 작업을 하면서 변하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프랑스 인상파풍 그림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영국 ‘로열 아카데미’에서 큰 찬사를 받았고, 사전트의 작품 중 처음으로 영국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소녀들의 하얀 원피스에 등불의 주황색 노란색이 물드는 것 같고 백합의 진한 향기와 장미의 고혹한 향이 그림 밖으로 풍겨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 이후 초상화가로 승승장구하며 미국을 빛낸 화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세계의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걸리는 명예도 누렸답니다. 제목에 백합이 두 번 들어가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당시 인기가 있었던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인용했다고 합니다.
존 싱어 사전트, < 캉칼에서의 굴 잡기>, 1878
캉칼은 브르타뉴 북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굴과 그것을 수확하는 그림 같은 어부 여성들로 유명했습니다. 사전트는 이들의 노동의 세부 사항을 보여주기보다는 촉촉한 분위기, 부드러운 바람, 젖은 모래의 반짝임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노동의 고단함을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이지만 엄마 따라 함께 온 소년의 바지 접는 모습이 귀엽고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고사리 손이라도 보태려 했을까요
그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허용하고, 피곤하면 잠시 쉬면서 감상하는 소파도 편안하게 준비되어 있는 전시실과 갤러리마다 벽지, 조명 등이 다르게 하여 전시된 작품들이 더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이 전해집니다.
존 싱어 사전트의 방에서 그의 그림을 구경하고 자원봉사 도슨트인 테리에게 "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더니 다시 안드레아의 데스크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군요..
안드레아가 나를 지칭하여 Special Friend라고 지칭하면서 테리에게 일본관 위치에 대해 알려줍니다. 친절한 테리 덕분에 쉽게 일본관으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관에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족자 그림과 판화 그림, 우타가와 히로시게, 모리무라 레이, 하세가와 유이치 등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보스턴 미술관(MFA)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상징적인 작품을 포함해 광범위한 일본 목판화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포니즘(일본풍의 사조)’을 만든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검은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색으로 메꾸는 고갱의 기법은 한국화의 윤곽선과 닮았다고도 합니다. 당시 고갱이 접하는 것은 한국화라기보다는 아마도 우키요에일 것이고 조선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화가들이 윤곽선을 사용하여 그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키요에는 ‘덧없는 세상을 담은 그림’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 호쿠사이는 파도 묘사의 대가였고, 히로시게는 비의 묘사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여주었다”며 “반 고흐도 히로시게로부터 실마리를 얻었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기술했습니다. 호크니는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란 책에서, “ 여섯 살 때부터 사물의 형태를 모사하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고 회상한 호쿠사이는 피카소 같은 천재”라고 합니다. 또한 “호쿠사이는 73세가 되어서야 식물과 나무의 성장과 새와 동물, 곤충, 물고기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을 전합니다. 임종 시에는 ”하늘이 5년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진정한 화가가 될 수 있을 텐데... “라고 아쉬워했다는 말은 진정한 대가의 겸손한 자기 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호쿠사이는 불안하고 유랑적인 생활 방식과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마스터하기 위한 강렬한 몰입으로 유명합니다. 생애 동안 3만 장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는군요. 반 고흐, 모네,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의 색채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평범한 배경에서 태어나 거울 제작자에게 입양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복잡하고 반사되는 표면에 매료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10대에 호쿠사이는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카와 슌쇼(Katsukawa Shunshō)의 작업실에 입사하여 목판화 기술을 배우고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호쿠사이는 그의 경력의 여러 단계와 자신을 재창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반영하여 평생 동안 30번 이상 예술 이름(호)을 바꾸었습니다. 정체되는 것을 싫어해서 평생 이사도 93번을 하고, 30번 이상 바꾸어 사용한 호쿠사이의 호에는 자기 풍자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말년에 선호하던 호는 ‘그림에 미친 늙은이 만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37.5cm x 25.5cm, 1831, 도쿄 국립박물관> 그림 속 배경인 후지산은 지금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듯 갈퀴처럼 구부린 모양의 거친 파도 묘사와 포말은 아주 유명하지요. 이 작품을 보고 인상이 깊었던 드뷔시는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기도 했답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1830 추정
대담하고 추상적인 형태에 가까운 구도에 주로 초점을 맞춘 호쿠사이와는 달리, 히로시게는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풍경 묘사에 끌렸으며, 더 부드럽고 섬세한 색상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히로시게의 작품에는 길, 사원의 길, 다리 위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며, 미묘한 톤과 세심하게 구성된 관점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모두 묘사합니다.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히로시게의 <대나무 숲과 교바시 다리, 1857>는 모네의 <수련 연못, 1900>에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카메이도의 매화 정원> 판화그림을 보면서 시선을 매화 꽃송이와 아래 하단에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처럼 굵게 표현된 나뭇가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바쁘게 두었습니다. 그림 왼쪽에 나무를 설명하는지 붉은색 바탕에 글씨를 그려져 있습니다. 히로시게의 <카메이도의 매화 정원>은 반 고흐가 모사하기도 했습니다 <꽃핀 매화나무, 1887, 반 고흐 미술관>. 낯선 이국의 글자를 그림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연습을 한 후 그려 넣었을 반 고흐의 집중의 시간이 타인의 작품을 모방해 자신을 성장시키려 했던 노력의 한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안도 히로시게, <카메이도의 매화 정원>, 1857,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꽃 핀 매화나무>, 1887
매화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매화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81송이 매화꽃이 그려진 그림에 동짓날부터 하루에 한 송이씩 색칠을 해 나가다가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창문을 열면 꽃핀 매화향을 만나게 된다는 풍습이랍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중국에서 들어와 선비들 사이에 유행하던 풍습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려는 희망을 담고 있는 뜻이 담겨있답니다.
매화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선비 중에 우봉 조희룡을 꼽을 수 있겠지요.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달고 침실에는 매화 병풍을 둘렀으며 매화차를 마셨다는 조희룡.
그것도 모자라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 시를 썼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요즘 말로 “매화덕후”라고나 할는지요.
그의 그림 <매화서옥도> 에는 눈송이처럼 매화가 흩날립니다. 그림 속에는 선비가 혼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을까요? 아니면 매화꽃을 같이 바라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조희룡, <매화서옥도>, 조선 19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미술관 내의 여러 전시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미술관 카페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파란 잔디와 푸른 하늘의 뭉게 구름을 바라보며 중정에 있는 카페에서 미국에 사는 친구와 오랜 시간 통화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시 들어간 전시관에서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고 평범하지 않다는 살바도르 달리 스페셜 전을 보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직관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달리의 그림 중에서 <수에즈, 1932>는 깊은 웅덩이가 무덤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깊고 깊어 벗어날 수 없는 웅덩이, 양쪽에서 경사진 면이 캔버스의 상단까지 거의 올라가며 탈출할 길이 없어 보이고. 양동이에 담겨 있는 모래사막 위의 피라미드 그림이 그려진 액자, 표정을 알 수 없는 네 명의 인물이 위에서 있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솟아 있는 그림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독특한 자신의 삶 자체가 예술적인 해석이 필요한 살바도르 달리방을 나오면서 많은 그림들이 기괴하고 복잡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수에즈>, 1932
1982년에 개관된 한국관에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보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습니다.
8폭 화려한 병풍과 함께 전시된 청자와 달항아리 백자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차일드 하삼과 필립 해리의 작품은 못 보았지만, 많은 유럽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180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 초기 집을 옮겨 온 전시관, 각국의 다양한 의자들, 언뜻 보아서는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런던 스타일과 보스턴 스타일 비교한 가구들과 악기들, 그림들을 둘러보고 간 규모가 큰 이집트 전시관에는 사후 세계를 믿었던 이집트인들의 장례 풍습뿐만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미라관, 장기 보관함, 여성의 옷, 바빌론 전시관의 사자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타일 벽 장식, 각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는 아름다운 상형문자, 그리스 로마관도 빠질 수가 없지요. 무릎과 신발이 많은 관람객들이 만져서 노랗게 변색이 된 <만져볼 수 있는 링컨 동상>까지 보물 창고 같았습니다.
이 둘은 무슨 비밀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요?
눈까지 감으면서 집중해서 잘 듣고자하는 하얀 여인상에게 커다란 에코백을 든 여인의 시선에는 장난기가 가득합니다.
시간 관계상 일부만 서둘러 보게 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습니다. 일회 관람 비용보다 그다지 높지 않은 1년 회원권을 구입해 천천히 구간 구간 나누어 보게 되면 좋을 것 같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나왔습니다.
저녁 식사 후 Wheelhouse Bar에서 Gemstones Quartet의 흥겹고 경쾌한 연주를 들으며
춤을 즐겼습니다. 어머나, 승객들의 신청곡 중에 Neil Diamond의 <Sweet Caroline>이 있네요.
미국 보스턴에서 온 승객일까요?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팀의 경기가 열리는 것도 아닌데 댄스홀에서 춤을 추는 승객들이
so good
so good
so good
떼창을 하는군요.
좋은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