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용히 부서지고, 다시 피어나다.

병실에서 마주한 약함, 그리고 은혜의 손길

by 새싹맘

병원 생활이 길어지니 무료해지기도 해서, 오랜만에 영어 회화 수업을 다시 들었다. 화면 너머 외국인 선생님은 내 안부를 물으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쪽으로도 돌아눕지 못한 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에, 결국 수업은 이어가지 못했다. 그 눈빛이 내 처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늦은 나이에 찾아온 임신이라 수업 때마다 기쁨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그 기쁨이 무너져 내린 듯했다. 아기의 생존 여부만 간단히 전했을 뿐인데도 선생님은 마치 다 죽은 사람 보듯 나를 불쌍히만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조카는 새싹이보다 8개월 먼저 태어나 지금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했다. 허벅지가 비욘세 전성기처럼 탄탄하다며 감탄하던 그 모습이 떠오르며, 나도 늘 “곧 내 아들 보여줄게…” 하며 웃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어쩌면 정말 곧,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곧’이 아닐 수 있기에 그 두려움이 더 깊게 스며든다. 조산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다.


남편 곁에 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수업 속에서 나 자신이 철저히 ‘환자’로만 비춰지는 현실을 선명히 자각했다. 기쁨이 아닌 불쌍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이는 내 모습이 서글펐다.


내일은 피검사를 위해 오늘 밤 열 시부터는 금식이다. 누워만 있는 생활 때문에 임신성 당뇨 위험도 있어 나는 수시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 결혼 전에는 워낙 말라깽이처럼 깨작깨작 먹던 탓에 마른 체형에 조금씩만 먹던 습관 덕에 임신성 당뇨는 남의 일이라 여겼는데, 좁은 병실에 갇혀 지내며 닥치는 대로 먹다보니, 이제야 다른 산모들의 고충이 조금은 보인다.


오후에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고열과 발진으로 힘들어하는 딸아이의 사진을 보냈다. 예쁘고 뽀얗던 아기가, 이마에 열 패치를 붙이고, 울긋불긋한 발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일 입원한다고, 기도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내 상황을 전하지 못했다. 조기양막파수로 누워 있다는 사실이 괜히 더 걱정만 끼칠 것 같아서였다.

사진 속 친구 아기를 보다가 문득, 우리 새싹이가 겹쳐졌다. 좁고 어두운 자궁 안에서, 양수가 다 빠져나간 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새싹이… 그 작은 몸도 혹시 온몸이 아픈 건 아닐까.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다 아주 잠깐, 나쁜 마음이 스쳤다.
‘그래도 너는 만삭에 낳은 아기잖아…’
질투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픈 친구의 아기를 보며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내 아기와 비교하며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나마 넌 괜찮잖아” 하는 속삭임이 들렸고, 나는 그 말을 감정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좁은 마음을 다듬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건강한 아기의 사진을 봐도 마음이 아프고, 아픈 아기의 사진을 봐도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의 모습은 그저 내 마음을 저리게 한다. 마치 임신을 하지 못하던 시절, 배부른 산모만 보아도 눈물이 솟구치던 것처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을 통해 나를 사용하기 좋은 질그릇으로 빚어가고 계신지 모른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고통의 자리에 두신 이유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감싸 안게 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쓰라린 시간이지만, 그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믿음으로 붙든다.

그럼에도 오늘은 많이 약해졌다. 단단해지자 다짐하면서도, 때로는 힘이 빠지고 눈물이 솟는다.


오후에는 휴가 중인 남편과 함께 <오징어게임 1>을 봤다.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보는 건데, 결혼 전엔 각자 따로 보았던 드라마였는데, 지금은 같은 자리에서 지난 기억을 함께 꺼내 나눌 수 있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연애와 결혼 생활을 돌아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 안에 함께 울고 웃으며 켜켜이 쌓아온 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저 옆에 나란히 누워 같은 화면을 바라보는 일상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다. 병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남편이 곁에 있으면 세상이 더 넓어졌다. 그리고 나는 바란다. 그 넓어진 세상을 우리 가정이 사랑으로 차곡차곡 채워가기를…


오늘도 나는 약해졌다가, 다시 사랑으로 일어섰다.

남편의 따뜻한 곁과, 내 안에서 버티고 있는 새싹이 덕분이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가 있었다.


주님, 내가 겪는 아픔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이 고통의 시간이, 언젠가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리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더 넓은 마음으로 자라게 하소서.

오늘도 새싹이의 작은 심장을 주께서 붙드셔서,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을 통해 강하심을 드러내시고, 저의 눈물을 통해 위로의 강이 흐르게 하소서.

새싹이를 통해, 그리고 우리 가정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내가 겪는 아픔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이 시간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품어줄 수 있는 더 넓은 마음으로 열매 맺기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주님 뜻에 합당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소망해 본다.


병실의 좁은 침대 위, 넓어진 세상.png



keyword
이전 11화21주, 크리스마스의 작은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