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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지막 하루일지도 모른다

핏덩이와 진통

by 새싹맘

2024년 12월 31일. 임신 21주 6일.


단 하루만 더 버티면 새싹이는 유산이 아니라 조산이 된다.
22주부터는 살릴 기회, 선택의 권리, 의료진과 논의할 자격이 생긴다.


하지만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침, 친정엄마가 보호자로 보초를 서기로 했다.
엄마의 굳어진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이 평범한 하루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을...


새벽 6시 30분

손바닥 3개 분량의 양수.
심박수는 155.
“괜찮아요”라는 말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전 10시 — 손바닥 2개
오후 1시 45분 — 손바닥 2개


새싹이가 양수 없이 버티는 동안,
나는 아침도, 점심도, 요플레 음료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내가 넘기는 한 숟가락이 새싹이의 하루가 될 거라 믿으며.


잠시 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간호사님께 여쭤봐. 오늘 초밥 먹어도 되는지… 2024년 마지막 날이잖아."
나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밥 종류는 안 당겨. 괜찮아.”

사실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산해진미라도 목구멍의 가시일 뿐이었다.


엄마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소변통이 넘칠 듯 가득 차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
수치심과 공포가 한꺼번에 쑥 밀려왔다.


엄마가 뒤늦게 돌아오자 나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하마터면 넘칠 뻔했어요…”
작은 일에도 가슴이 무너지는 하루였다.


오후가 되자 목이 칼처럼 칼칼해졌다.
가습기 탓인가 싶어 엄마에게 부탁했지만 가습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느낌.
불길한 예감이 방 안의 공기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려왔다.


오후 4시 45분 — 손바닥 1개.
다행히 피는 없었다.
하지만 주치의의 말은 차갑게 꽂혔다.

“피는 멈췄다가도, 다시 한 번에 확 쏟아질 수 있어요.”


50m 앞의 복도조차 갈 수 없는 몸.
침대라는 감옥에 갇힌 채, 나는 느꼈다.

조금씩, 확실히, 끝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괜찮을 거다. 아빠가 기도하고 있다.”
그 말조차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기적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남편과 나누었던 말을 떠올린다.

“새싹이는 정말 잘생겼을 거야.”
“여보 닮았으면 당연히 잘생겼지.”

웃으려 애썼다.
절박한 순간일수록 좋은 생각으로 덮어보려 애쓰는 기적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처럼...


저녁 7시 15분.
피 섞인 양수 손바닥 4개.
그리고 진통이 시작되었다.


트럭이 온몸을 밀어붙이는 것 같은 고통.
짙고 뜨겁고 찢어지는 통증.
나는 입을 막고 신음했다.
다른 산모가 들을까봐.

“안 돼… 안 돼… 제발…”


그리고 순간.
미끈거리는 주먹만 한 덩어리가 쑥 빠져나왔다.


세상이 멈췄다.
숨도 멈춘 듯했다.


“새싹이…? 새싹이 아니지…? 제발…”


떨리는 손으로 콜 버튼을 눌렀다.

“뭐가… 뭐가 나왔어요… 와주세요 제발…”

간호사가 뛰어들어와 말했다.


“아기 아니에요. 핏덩이에요.”

그 말이 위로였는지, 경고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핏덩이가 나왔어… 열이 38도가 넘어…

새싹이는 아직 살아 있어… 심박수는 150…”


“지금 갈게.”

짧은 대답 뒤 전화가 끊겼다.
남편의 숨이 떨리고 있었다.


타이레놀을 먹고 열이 37.7도로 떨어졌다.
정신을 붙잡기 위해 가족 단톡방에 붉은 얼굴 사진을 보냈다.

“혈색 좋아 보이네 ㅎㅎ”

웃기다.
말 그대로 웃기는데, 죽을 지경이다.
웃다가 눈물이 나고, 울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몰랐다.
양수가 터진 산모의 열은 비극의 예고라는 걸.
새싹이가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신호라는 걸.


밤새 오한에 떨었다.
다시 분만실로 실려갔다.
눈을 감을 힘조차 없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울 힘도 없었다.
눈물조차 몸을 위해 아껴야 했다.


내일이면 22주.
하지만 오늘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

“새싹아… 제발 버텨줘…
너는 살아야 해…”

지금 태어나면 이 병원에서는 살릴 수 없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새싹이가 살 길을 찾기 위해
죽어가는 시간을 눈뜨고 지켜보고 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일 수도 있다.
내일이 기적일지, 이별일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나를 받아줄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22주. 시간이 없다.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
내일이면 유산이 아니라 조산이다.
기회가 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 사무엘상 2:6


새싹아,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한 줄기 길을 여실 것을 필사적으로 믿으며
너와 함께 이 밤을 버틴다.


오늘, 마지막 하루일지도 모른다.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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