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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Apr 26. 2024

25. STOP 기술: 일단 멈춰 봅시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각성조절 기술은 심리학 교수이자 심리치료전문가인 마샤 리네한이 개발한 변증법적행동치료에서 사용하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정서적 고통을 견디는 핵심적인 방법 중 하나이며,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간단히 STOP기술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말 그대로 ‘멈추는 것’이 핵심인 기술이지요. STOP 기술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S: Stop (하던 말이나 일, 행동 등을 멈춥니다.)

 T: Take a step back, take a breath (한 발 물러서서 호흡을 합니다.)

 O: Observe (몸과 마음, 주변상황을 관찰합니다.)

 P: Proceed mindfully (잘 알아차리면서 반응하거나 행동합니다.)





S. 각성 수준 측면에서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멈추는 것’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멈추게 되면, 자동적으로 진행되던 처리 과정이나 반응 과정도 함께 정지됩니다. 현재에 온전히 머물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T. 멈추고 난 뒤에는 한 발 물러서서 호흡을 챙깁니다. 앞서 우리는 다양한 호흡의 기술을 배웠지요. 여러 기술들 중 특히 날숨을 챙기는 것, 그리고 천천히 호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기술들은 지나치게 흥분한 몸과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줍니다. 


O. 그 후 차분히 관찰을 합니다. 관찰의 대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 주변 상황입니다. 심장박동이나 호흡의 빠르기, 근육의 긴장도 등을 알아차리고, 감정이나 생각, 충동을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아울러 지금 자신이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으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등을 관찰하는 겁니다. 일종의 정보 수집 및 상황 판단이지요.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작업인 겁니다. 


P. 정보가 수집되면 그 정보에 기반해서 적절한 다음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이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그 행동이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아차리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STOP의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 P의 이야기입니다. 


P는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지요. 엄마는 반대합니다.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하룻밤을 밖에서 잘 수 있냐고 흥분을 하기 시작합니다. 


P도 지지 않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이 모두 허락해 주셨다.’  전략을 써 봅니다. 병원을 운영하는 교양 있는 친구 1 어머니도 허락하셨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집안도 좋은 친구 2 아버지는 용돈까지 주셨다, 등등의 말을 해 봅니다. 기가 죽을 줄 알았던 엄마는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는지 “걔네랑 너랑 같냐!” 로 응수해 옵니다. 


싸움이 격렬해집니다. P의 각성 수준도 올라가고, 엄마의 각성 수준도 올라갑니다. 마치 두 마리의 맹수가 흥분하며 싸우는 양상으로 변해갑니다. 남동생과 아빠는 이미 자리를 피한지 오래입니다. 


이때 P는 학교 수업시간에 더벅머리 담임 선생님께 배웠던 STOP 기술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래서 일단 하던 말을 멈춥니다. 멈추고 잠깐 기다리면서 천천히 호흡을 챙깁니다. 엄마는 얘가 갑자기 뭘 하고 있나, 하는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P는 자신의 심장박동이나 긴장상태를 관찰하면서 각성 수준에 점수를 매겨봅니다. 4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높습니다. 조금 더 깊게,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어깨와 턱에 힘을 빼 봅니다. 각성 수준이 조금 더 내려갑니다. 이제 3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상황을 관찰합니다. 엄마의 표정을 보니 엄마는 아직 각성 수준이 높습니다. 절대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다만 딸의 행동이 조금 의아했는지 준비태세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P는 일단 엄마의 각성 수준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엄마의 각성 수준을 낮출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엄마는 스킨십에 약하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엄마는 화를 잘 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다가가서 꼬옥 안아주면 금세 기분이 풀렸던 것이지요. 


엄마에게 차분히 다가갑니다. 그리고 가만히 엄마를 안습니다. 엄마의 몸에서 느껴지던 긴장이 스르르 풀립니다. 얘가 왜 이래, 하며 한 두 번 몸을 비틀지만 싫지 않은 눈치입니다. 작전이 먹히고 있습니다. 


P는 이때를 노려 엄마의 마음을 한 번 더 녹이기로 합니다. 


“아니, 내가 엄마 마음 잘 알지, 이쁜 딸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나도 다 알아 엄마 맘. 그래서 정말 안전하게 있다가 올 거야. 엄마가 많이 걱정되면 친구들 부모님이나 언니, 오빠들 중에 한 사람이랑 같이 갈게, 응? 아, 그리고 그 근처에 정말 맛있는 빵집이 있대. 갔다 오는 길에 엄마 좋아하는 빵도 사다 줄게. 거기 정말 맛있어서 전국에서 온대.” 


엄마의 표정이 한결 더 누그러집니다. 전국 단위 빵집은 아니지만 맛있는 곳이라고 했으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닙니다. 사실 엄마도 이미 아는 눈치입니다. 그래도 기분은 많이 풀렸고, 이미 허락의 명분은 충분히 모였습니다. 


“그럼 꼭 어른 한 분 모시고 가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엄마는 출발 당일 “네가 돈이 어디 있냐”라고 말하면서 빵 값을 넉넉히 주셨지요. 





자 어떻습니까? 일이 너무 잘 풀려서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끼시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P가 STOP기법을 어떤 식으로 적용했는지에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적용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전반적인 흐름이나 과정은 대체로 유사합니다. 


물론 P처럼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엄마 어제부터 다이어트한다” 며 빵집 딜을 걷어차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각성 수준은 조절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정서적 고통을 적당한 선에서 유지하면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다룰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 STOP의 전반적인 과정은 잘 이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STOP은 이후 공부할 다양한 기술의 기본입니다. 특히 일단 멈춰서 호흡을 챙기고 관찰하는 것은 기본기 중에 기본기라 할 수 있지요. 이 기술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각성 수준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각성 수준을 평가한 뒤에는 상황에 맞게 적절한 조절 전략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지요. 다음 시간에는 각성 수준별로 어떤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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