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견디고 완화하기
각성조절 기술을 어느 정도 익혔다면 본격적으로 고통을 견디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고통을 견디는 행동은 회피하지 않기, 도피하지 않기, 완화하지 않기로 구분됩니다. 이론상으로는 세 유형의 고통감내행동이 순서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유발하지만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한 활동을 회피하지 않고 수행하는 것,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고통을 견디면서 도피하지 않는 것, 충분히 활동을 한 뒤에 남아있는 고통을 완화하지 않는 것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지요.
할 수 있다면 이 흐름대로 연습을 진행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회피해 왔던 어떤 과제를 새롭게 수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예컨대 지난 10년 동안 사람들을 피해 다니며 살아왔다면, 갑자기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울 수 있지요. 이런 분은 순서를 바꾸어서 완화하지 않기, 도피하지 않기, 회피하지 않기 순으로 연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도피하지 않기는 완화하지 않기 훈련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회피하지 않기는 도피하지 않기, 완화하지 않기 훈련과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회피하지 않기 훈련은 고통감내훈련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훈련이라고 볼 수 있지요. 반면 완화하지 않기는 어떤 이유에서든 고통이 유발되었을 때 실시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고통이 유발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지만 편의상 과제 수행과 관련된 고통, 그리고 과제 수행과 무관한 고통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완화하지 않기는 두 유형의 고통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훈련법입니다. 과제수행과 관련된 고통은 도피하지 않기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니 과제 수행과 무관한 고통을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지요.
우리는 살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정적 사건을 겪습니다. 풀메이크업을 하고 다니는 편인데 우연히 늦잠을 자서 간단히 기본화장만 하고 나왔을 때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옆 부서 김대리와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는 일이라든지, 눈물겨운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장만한 고가의 운동화를 신고 기분 좋게 등교를 하는데 지나가던 자동차가 흙탕물을 끼얹고 가는 것과 같은 그런 사건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이미 각성 수준이 올라간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부끄러움과 당혹감일 수도 있고, 짜증과 분노일 수도 있겠지요. 상승한 각성 수준과 함께 고통이 유발되었을 때 이 고통을 빠르게 완화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연습의 핵심입니다.
물론 각성 수준이 4점 이상이라면 각성을 낮춰주는 기술을 사용해서 3점 수준까지 내려야 합니다. 각성 수준이 3점 이하라면 고통을 그대로 견뎌봅니다. 관건은 시간입니다.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결국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고통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유발한 사건의 유형이나 고통의 강도, 주로 사용하는 고통완화 수단의 특징, 견디는 사람의 기본적인 억제능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목표를 세울 때 기본적으로 고려할 기준을 정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가능하면 실패하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표여야 합니다.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설정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실패가 늘어나면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우리는 이미 수많은 운동 및 다이어트 시도와 실패를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매일 운동을 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이런저런 장애물에 걸려 실패하기 마련이지요. 가능하면 현실적이면서도 실패 가능성이 낮은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둘째,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목표를 설정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0.1초를 더 견디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해 봅시다. 이 목표는 우리가 ‘견뎌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달성될 겁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큰 의미는 없겠지요. 의미가 있으면서도 실패하기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쾌한 감정 때문에 고통스러워지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비교적 근무 환경이 자유로워서 언제든 원할 때 담배를 피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불쾌감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곧바로 담배를 피우곤 합니다. 이 경우 30초에서 1분 정도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 고통을 견디는 능력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30초에서 1분은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자각하면서 시간에 따른 변화를 파악하고, 자동적인 완화행동을 억제하는 연습을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요.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때 1분 동안 가만히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물론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말입니다. 특히 충분히 깊고 느리게 숨을 내쉬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호흡을 하면서 몸의 감각을 관찰하고 그 변화를 감지하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1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1분이라는 시간 동안 고통을 견디는 행동에는 성공한 것이니까요. 고통을 견디는 훈련에서는 고통완화행동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일정 시간 동안 기다린 뒤에 하는 겁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1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가만히 기다리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 뜻밖에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감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미처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담배를 피우는 일도 꽤 흔합니다. 마치 기계가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작동하듯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자동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지요. 고통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담배를 피우는 것도 비슷한 과정입니다.
1분 동안의 시간 지연은 이러한 자동적 과정을 멈추는 효과가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지요. 그 여유는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몸도 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통이나 각성 수준이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감소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느리게 깊은 호흡을 하면서 적당히 어깨와 턱의 힘을 뺀다면 그 가능성은 더 높아지겠지요. 우리는 이 기회를 누릴 수 있습니다. 1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는 100% 확률로 담배를 피웠겠지요. 이제는 그 확률이 일정 수준 감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완화행동을 지연하는 것만으로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을 견디는 행동에 '성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적응적인 완화행동의 빈도를 줄이는 것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주로 사용하는 완화행동이 특별히 부적응적이지 않다면 두 번째 토끼는 놓아주셔도 됩니다. 완화행동을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든 과도하면 문제가 되지요. 예컨대 완화행동으로 달달한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자체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이지요. 실제로 감각위안기술에는 달달한 음식 먹기가 당당하게 포함될 수 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필요할 때에는 사용하십시오. 다만 사용 빈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자신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빈도를 줄여야겠지요. 예컨대 당뇨병 가족력이 있거나 당 수치가 꽤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갔다면 ‘부적응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고 적절히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황에 맞게 목표를 설정하고, 설정한 만큼 완화행동을 지연하십시오. 그 이후에는 완화행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가능하다면 적응적이고 해롭지 않은 완화행동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 행동들을 많이 배워서 적당히 돌려가며 사용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분들은 특정한 완화행동을 하지 않고 기다려 보기 바랍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천천히 호흡하면서 말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정도로 각성 수준이 내려가면, 하던 일에 다시 집중하면 됩니다.
우리는 늘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고통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지요. 우리는 일정 수준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4점 이상의 높은 각성 수준을 동반하는 고통이 아니라면 사실 특별히 완화행동을 하지 않아도 하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3점 이하의 각성 수준, 즉 감내영역 안에서도 자동적으로 완화행동을 하곤 합니다. 마치 고통은 조금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과민하게 반응하기도 하지요.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고통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일정 수준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러니 염려 말고 한 번 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각성 수준이 3점 이하라고 판단된다면, 고통을 겪는 상황이더라도 완화행동을 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하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고통이 견딜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