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활동을 조금 더 지속하기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두 번째 훈련은 ‘도피하지 않기’ 입니다. 이 훈련은 특정한 과제를 설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사는 데 중요한 과제라면 더 좋겠지요. 추가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시간 조절입니다. 시작하고 끝내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과제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시간을 조절할 수 없는 과제라면, 도피하지 않기 훈련의 과제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조건을 만족하는 과제라면 어떤 것이든 훈련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학생이라면 특정 과목을 공부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글쓰기를 택할 수 있겠지요. 건강이나 외모관리 측면에서 운동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운동으로 훈련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여러분이 이미 해본 적이 있거나, 하고 있는 활동일 겁니다. 다만 원하는 만큼 오래, 꾸준히 지속하지 못할 뿐이지요. 중요한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도피를 반복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피하지 않기 훈련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할 일은 우리의 도피 패턴을 파악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과제를 수행하다가 그만 두는 과정을 꼼꼼히 탐색하고 분석해 보는 것이지요. 일종의 복기(post mortem)라고 보면 됩니다.
바둑을 두는 분들은 다른 사람과 대국을 한 뒤에 꼭 따로 시간을 내어 처음부터 다시 순서대로 두어 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단계적으로 꼼꼼히 분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떤 지점에서 실수를 했는지,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 나의 습관적인 반응 패턴은 무엇인지, 상대의 전략에 빈 틈은 없었는지 등을 따져보는 것이지요.
복기는 좋은 습관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국을 복기하듯이 과제 수행 과정을 꼼꼼하게 복기하기 바랍니다. 특히 과제를 포기하기 전후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는 겁니다.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분은 실제로 과제를 수행하면서 생각과 감정, 몸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찰해 보기 바랍니다. 그만 두고 싶은 충동이 강해질 때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정서적 고통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 보는 겁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S는 오늘도 어김없이 독서실로 향합니다. 그곳이 독서실인지 수면실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지만 어쨌든 갑니다. 바깥 공기가 쌀쌀합니다.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수학능력시험이 이제 1년 남았다는 의미겠지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독서실로 들어갑니다. S의 자리는 복도 끝 작은 방에 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니 공부하는 사람들의 체취와 습기, 난방의 열기가 뒤섞여 답답하고 역한 느낌을 줍니다. S는 이 감각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독서실은 다 똑같으니까요.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 공부할 과목은 수학과 생물입니다. ‘수학’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무력감과 적대감이 듭니다. 칼과 창만 안 들었다 뿐이지 이놈은 적이 틀림없습니다. 벌써 기분이 조금 나빠집니다. 그래도 일단 시작은 합니다. 앞 부분의 개념과 원리를 읽어내려 갑니다. 일부는 이해가 되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분이 더 나빠집니다. 이 교재를 쓴 사람이 원망스러워집니다. 교재 표지에 분명하게 ‘쉽게 쓴’이라고 되어 있어 큰 맘 먹고 샀는데, 사기를 당한 느낌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작가에게 돌리며 분노하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다른 애들은 이걸 ‘쉽다’고 느낀단다.” 악마의 소리입니다. 떨쳐내려고 애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자괴감이 몰려옵니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더 읽어 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일단 어느 정도 이해한 것들만 기억하고 문제를 풀어보기로 합니다. 1번 문제를 읽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다시 읽어 봅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히 앞 부분에서 어느 정도 이해한 개념과 원리를 반영한 문제라고 되어 있는데, 문제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짜증이 몰려옵니다. 작가가 원망스러워지고, 수학을 필수 과목으로 만든 사람이 원망스러워지고, 애초에 수학을 만든 고대의 누군가가 원망스러워집니다. 무엇보다 1번 문제도 풀지 못하는 못난 내가 원망스럽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간단한 수학 문제도 풀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어차피 더 붙잡고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력감이 몰려옵니다. 책을 덮습니다. 핸드폰을 열고 메시지를 체크합니다. 친구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눕니다. 이후 오늘 나온 웹툰을 간단히 보고 연예 기사를 훑다 보니 조금씩 졸음이 옵니다. 오늘도 이곳은 수면실이 될 모양입니다.
우리가 자주 포기하는 과제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객관적으로 어렵다기 보다 주관적으로 어려운 과제이지요. 우리의 목표는 선정한 과제가 우리에게 특별히 어려운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S는 수학공부를 어려워했습니다. 수학적 개념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수학공부에서의 반복적인 실패가 자괴감이나 무능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고통 중 상당 부분은 자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골몰합니다.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응에 도움이 되지요. 다만 부정적 자기인식이 과도해지면 상당한 수준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수학 공부 과정에서의 실패 경험은 S의 부정적 자기인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적 자기인식이 활성화되면, 정서적 고통이 빠르게 증가합니다. S가 수학 공부라는 중요한 과제를 반복적으로 포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요한 과제로부터 도피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면 가능한 선에서 사전 작업을 해 줍니다. 도피하는 이유 중에 바꾸거나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과제에서 실패하는 것이 정말 나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인지 따져 보기도 하고, 나의 존재 가치를 능력으로만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도 생각해 보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거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검토하고 따져보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자기 이해를 증진시킨다는 장점이 있으니 시도해 보기 바랍니다.
사전 작업을 마무리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도피하지 않기 훈련을 시작합니다. 훈련의1/10
방법은 간단합니다. 완화하지 않기와 마찬가지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곧바로 도피하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지연한 뒤 도피하는 겁니다.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STOP 기술을 이용해 각성 수준을 확인합니다.
(STOP 기술 참고: https://brunch.co.kr/@524aa6c9eb9a416/38)
2. 각성 수준이 4점 이상이라면 각성조절기술을 이용해 각성 수준을 낮춰 줍니다.
3. 각성 수준이 3점 이하라면 일정시간 동안 과제를 더 지속합니다.
4. 일정 시간 동안 과제를 지속한 뒤에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도피합니다.
지연 시간을 정하는 문제는 완화행동 훈련 때와 동일합니다. 실패하기 어려우면서도 의미 있는 시간을 설정합니다. 제가 이 방법을 처음 소개했을 때, 한 학생은 1/10 비율을 적용하면 꽤 도움이 된다고 알려주었지요. 아직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시도해 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어떤 과제를 60분 동안 지속했다면,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때 적어도 6분 동안 더 과제를 지속하는 것이지요. 6분간만 지연하면 그 이후에는 과제를 더 지속해도 좋고, 도피해도 괜찮습니다. 시간 설정이 까다롭다면 빈도로 설정해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문제 10개를 풀었다면, 1개 정도를 더 푸는 것이지요. 어떤 방법이든 앞서 소개한 두 가지 기준에만 맞는다면 자유롭게 목표 시간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고통감내행동은 결국 시간의 문제입니다. 짧은 시간일지라도 고통을 견디게 되면, 그 만큼 고통을 견디는 경험이 늘어나는 것이지요. 한 두 번의 지연은 미미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반복적인 지연으로 시간이 누적되면 상당한 수준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일정 시간 동안 견디면 고통을 견디는 것과 관련된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고통에 휘둘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이제는 고통을 적당히 견디면서 다룰 수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적당한 수준이라면 고통을 견딜 수 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중요한 일을 조금 더 할 수 있다, 고통을 곧바로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느 정도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와 같은 생각과 함께 고통을 견디는 것에 대한 유능감이나 자신감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과제 수행을 중단하고 도피한 뒤에는 '완화하지 않기 훈련'을 적용합니다. 각성 수준이 4점을 넘었다면 각성조절 기술을 사용해서 각성 수준을 낮춰 주고, 3점 이하라면 그대로 견뎌보는 겁니다. 물론 이때에도 일정 시간동안 지연한 뒤 본인이 원하는 완화행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완화행동을 하지 않고 견뎌 보기 바랍니다. 원한다면 그 상태에서 다른 과제나 활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활동을 전환하는 것이 고통 수준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완화하지 않기 훈련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면 ‘도피를 하지 않는 것’도 시도해 보기 바랍니다. 도피하지 않기 훈련의 특성 상 도피하지 않고 머물수록 각성 수준은 다시 증가하기 쉽습니다. 3점 이하로 내려갔다가도 다시 4점 수준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경우 과제를 잠시 중단하고 각성조절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짧은 시간 내에 과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공간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각성 수준을 3점 이하로 돌리고 나면, 다시 과제를 지속하는 겁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방법은 필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본 목표는 정해진 시간 동안 지연하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다면, 방금 말씀드린 상급 훈련도 시도해 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