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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Aug 30. 2024

13. 가려진 삶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이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


소설가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 보면 주인공 필립이 동방의 한 임금 이야기를 떠올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임금의 인생과 현자의 인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보이는 듯합니다.


임금은 권력을 가졌지만 상당히 바빴던 것 같습니다. 권력은 공짜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권력을 가졌으니 이 정도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이런저런 요구들을 해 왔고, 그것도 못해낼 것 같으면 다른 사람한테 넘기라며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렸을 겁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고, 애써 만들어온 성과도 충분히 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현자는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지만, 임금의 권력에 눌려 자신의 능력을 '요약하기'에만 사용합니다. 꼼꼼한 성격의 그는 맡겨진 일을 대충 하지 못했고,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이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작업을 마무리 지어 가져갔지만, 정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할 대상은, “응? 좀 더 요약해 와,” 하고 가볍게 그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서, 그는 그렇게 늙어갔습니다.  


임금도, 현자도, 그 외 수많은 사람들도, 다 그렇게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어갔습니다.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새로운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나요?


아마 여러분 중 다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고통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경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과 기분 좋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경험,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깔깔거렸던 경험,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키워가던 경험, 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뭉클한 감정. 이런 경험들을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망설여지지만, '고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혹자는 이런 경험을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고통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습니다. 너무 짧아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부정적 색깔과는 다른 긍정적 색깔의 경험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경험을 긍정정서, 혹은 긍정적 감정 등의 용어로 포착합니다.




긍정정서(positive emotion)란 긍정적 느낌, 혹은 좋은 느낌을 수반하는 정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즐거움이나 기쁨, 만족감, 재미, 애정, 희망, 자부심 등이 포함됩니다. 심리학 영역에서 감정 혹은 정서에 관심을 둔 역사는 길지만 긍정정서에 주의를 기울인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 바바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이 있습니다.


긍정정서 연구자 바바라 프레드릭슨


프레드릭슨은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긍정정서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긍정정서의 기능은 부정정서의 기능과 상반됩니다.


두려움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정서는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도망이나 싸움에 적합한 상태로 만듭니다. 실제로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경험할 때 우리의 근육은 평소보다 더 팽창합니다. 심장도 빠르게 뛰고, 주의와 사고, 행동의 폭이 좁아집니다.


프레드릭슨이 본격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긍정정서도 이와 유사한 생리적/심리적 반응을 유발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왔지요. 긍정정서를 경험하면 근육이 이완되고, 심장 박동이 안정화되며, 주의와 사고, 행동의 폭이 넓어졌던 것입니다.


프레드릭슨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긍정정서의 확장 및 구축 이론(broaden-and-build theory of positive emotion)입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긍정정서는 단기적으로 주의와 사고, 행동의 폭을 확장하고, 그 결과 다양한 개인적 자원을 구축한다는 입니다.  


즐거움이라는 긍정정서를 경험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즐거우면 우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그중에는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거나 함께 어울려 노는 등의 활동도 포함될 수 있지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대인관계 기술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원은 추가적인 긍정정서를 경험하는 데 기여하고,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처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긍정정서가 확장하고 구축하는 과정(출처: Psychology of Human Emotion(An open access textbook))



보다 흥미로운 점은 부정정서와 긍정정서의 관계입니다. 앞서 두 유형의 정서가 갖는 기능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을 소개했습니다. 한쪽은 좁히고, 다른 한쪽은 확장하지요. 이러한 상반된 기능을 이용해 부정정서의 효과를 취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난 후 짜증 수준이 높아진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기분이 몹시 나쁩니다.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 상태이고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그 녀석을 골탕 먹일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은 없습니다. 더 짜증이 납니다.


이때 핸드폰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의를 돌릴 겸 인터넷을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다 아주 흥미로운 웹툰을 발견합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작화도 아주 훌륭합니다. 유머 코드도 나와 아주 잘 맞습니다.


즐거움을 만끽하며 한참 동안 웹툰에 빠져듭니다. 어느 순간 근육의 긴장은 풀어지고, 머릿속을 맴돌던 복수의 생각도 사악 사라집니다. 심장 박동은 편안하고 호흡도 자연스러워졌지요. 이제는 굳이 복수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웹툰을 소개하면서 친구를 구워삶아 원하는 다른 것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새로운 전략이 구체화되자 몸이 근질근질해집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흔하게 경험하는 것이라 놀라셨지요. 이것이 바로 긍정정서의 취소 효과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 다수는 이미 긍정정서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긍정정서를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부정정서나 고통의 영향을 효과적으로 취소하고 빠르게 본래의 상태로 돌아옵니다. 심리학자들은 스트레스 이후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능력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부릅니다. 연구에 따르면 긍정정서를 빈번하게 경험할수록 회복탄력성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Y의 사례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Y가 지방에서 회사를 다닐 때에도 불편한 일은 있었습니다. 부정정서 혹은 고통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동료들의 지원과 지지, 퇴근 이후 배우자와 함께 보냈던 긍정적 시간 등이 부정정서의 효과를 어느 정도 취소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Y의 긍정정서 경험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직장 동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배우자와도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지요. 개인적인 취미활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환경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부정정서와 고통의 효과를 취소하지 못하여 과도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긍정정서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셨을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긍정정서와 고통감내력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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