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나요?
매주 친히 오셔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꼭 한 번 안부를 묻고 싶었어요. 잘 지내냐는 물음에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겠지만, 누군가는 눈물을 터뜨리기도 하잖아요. 그저 인사일 뿐인데도요. 그래서 매일 보는 사람에게도 자주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간소하지만 촘촘히, 주변을 살피고 헤아린다면 갑자기 눈물 쏟는 이를 바라보면서 괜스레 미안한 감정을 느낄 일은 없지 않을까 해서요. 모두가 어려운 때일수록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힘나게 하잖아요? 매주 브런치라는 지면에서 만나 뵙는 고마운 당신들께도 진심을 담아 묻고 싶었어요. 지겹시리 쌀쌀맞은 이 계절을 어떻게 지나고 계신지요.
<돌아갈 수 없음>의 17화를 연재하는 지금, 저는 소회를 몇 자 적는 것으로 제 안부를 전하고 싶어요.
‘돌아갈 수 없다. 알고 나면 모르던 때로, 노련해지고 나면 서툴던 때로, 상처받고 나면 천진난만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작년 이맘때 이 문장을 적어놓고 곱씹다가,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공기 중에 봄기운이 만연하기 시작했고, ‘찬 기운이 멋쩍은 듯 슬슬 물러나고, 볕을 쏟아부을지 비를 흩뿌릴지 하늘이 갈팡질팡 망설이는 봄. 이런 때에 당신은 유독 결심하기를 좋아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렇게 틈틈이 몇 꼭지의 글을 써두었고, 지난 11월에 연재를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 쓴 몇 줄의 문장들로부터 지금까지 적힌 모든 이야기들이 줄줄이 딸려 나온 것입니다. 1년 동안 쓰고, 4개월 동안 연재했다는 것이 새삼 커다란 선물처럼 느껴지는군요.
글쓰기를 루틴화 하기, 적게나마 내 글에 독자를 초대하기 등 개인적인 목표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어떤 들끓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랄까, 세상에 대한 애틋함 같은. 오랜 시간 내재했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한 적 없던 마음들이 ‘바로, 지금이야!’하며 울컥 쏟아졌달까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가 아닌 ‘당신’에 대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은 나의 이야기이겠지만 당신들을 통과한, 당신들에게 활짝 열려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들 각자의 이야기와도 가지런히 포개어질 수 있는 유니버셜한 이야기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것 같다, 공감된다, 글을 읽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등의 피드백을 받을 땐, 정말이지, 날아갈 것 같았어요. 잘 가 닿았구나, 나의 진심이. 그거 말고 더 무얼 바랄 수 있을까요. 현생에 치이고 감정적으로 많이 소모된 때에도 일요일 연재를 어기지 않는 건, 더 큰 기쁨이 있을 거란 걸 알아서입니다. 쓰는 기쁨 + 할 일을 해내는 기쁨 + 읽히는 기쁨 + 이해받는 기쁨 + …. 저는 이 기쁨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다 읽어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꾸벅)
어렸을 땐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거창한 말들에 세상의 진리가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무엇이니 어렵고 거창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읽기와 쓰기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도 있지요. 그런데 요즘 부쩍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평범한 일상어로 쓰인, 우리가 지겹게 들어온 도덕규범이나 격언들에 이미 모든 답이 다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그걸 깨닫고 행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개별 숙제로 주어지는 것이겠죠.
요즘 제가 열심히 되뇌고 있는 두 문장이 있어요. 부모가 아이들에게 할 법한, 다분히 상식적이고 기본이 되는 말들입니다.
1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라.
2번. 겪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잘 생각해 보면 2번 문장은 1번 문장을 무화시켜요. 어차피 내가 직접 겪지 않는 이상, 생각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근데 그래서 더, 저 두 문장을 되뇝니다. 어차피 나는 타인을 다 이해할 수 없다(2번)는 걸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려고(1번) 노력합니다. 꾸깃꾸깃.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예요. 다 아는 체 하지 않기. 하지만 헤아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기. 그게 실패하는 순간도 있었겠지요. 그건 그것대로, 내가 겪어서 오직 나만이 아는 내 입장을 이해시키는 노력 정도로 퉁치려고 합니다. 저 자신에게 품는 애틋한 마음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사람’ 뒤에 물음표를 달았다가 하트를 달았다가 하면서요. 하지만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을 여전히 믿습니다. 고맙고 애틋한 마음과 별개로 나를 아주 괴롭게 만드는 것도 다 사람들이니까요. 타인의 말과 시선에 의해 무너져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 뼈저리게 느껴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침묵으로 조의를 표할 뿐입니다.
도무지 인류애가 끓어오르지 않는 날에도, 내가 너무 못돼 처먹은 것 같은 날에도, 남들이 더 못돼 처먹은 것 같은 날에도, 그래서 글이 안 써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날에도 쓰다 보면 삐죽했던 마음이 조금씩 둥글둥글해지더군요. 완성도가 떨어지고, 맘에 꼭 드는 글이 아니어도 그런대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래도 쓰려고 애쓴 저 자신에게 크레딧을 줍니다. 제가 타인이라는 지옥 안에서도 기쁘게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아요. 나를 북돋아줄 뿐이지 다그치지 않는 마음이요. 다독이고 칭찬할 수 있는 여유까지도요. 나에게 박한 사람은 반드시 남에게도 박하게 됩니다. 포부와 기대는 거대한데 헤아리는 마음이 부족하면 짜증만 남습니다. 그럼 다 아니꼽게 보이고 거슬릴 수밖에요. 꼭 그런 사람들이 자기와 무관한 이들에게까지 무리한 잣대를 들이대고, 한 마디씩 보태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진짜로 안 된다는 걸 깨닫는 시간들이 수차례 있었음에도요.
앞서 말했듯, 진리는 아주 심플한 말들에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이미 도처에 있고요. 그걸 어떻게 행하며 사느냐는 각자의 몫입니다. 그것이 행복에 관한 것이든,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든, 부와 성공에 관한 것이든요. 일단 저는 저 자신에게 친절해지기로 했습니다. 허준이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나에게 친절하고 내 고통에 애틋한 만큼, 남에게도, 남의 고통에도 항상 친절하고 애틋하고 싶습니다. 행동으로도, 글로도. 그게 제가 만난 행복에 관한 진리라서요. 물론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쫓는 행복은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행하고 계신지 궁금해집니다. 유독 결심하기를 좋아하는 봄, 어떤 뜻을 품고 계신가요?
말이 길었습니다. 이번 주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까지 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와서 읽어볼 만한 콘텐츠와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도록 나름의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항상 잘 지내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 글을 읽어볼 여유도 생기실 테니. 허허.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친절한 일요일 되시길. 누군가를 위한 짜파게티 요리사가 돼봐도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