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 달팽이 Nov 02. 2022

부모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업이다.

셋째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아이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맞닿아졌을 때 느끼는 행복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엄마인 내가 사랑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이가 내게 사랑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안고 있을 때 아이가 가끔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토닥여 준다.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두드리는 건지 단순한 손의 움직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낀다. 나의 부모님에게 받은 보살핌을 넘은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


나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무표정인 사진이 많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하나 있는 앨범 속에 사진이 많지 않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중 하나는 유치원에서 보내온 사진이다. 체육 활동을 하고 있는지 양팔을 벌리고 있다. 중심을 잡고 걸어야 해서 양팔을 벌려야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평범한 유치원 생의 모습으로, 유치원에서 체육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느낄지 모른다. 그런데 사진 속 아이의 모습은 자신감이 결여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사진을 본지도 꽤 됐는데 내 머릿속에 매우 선명히 남아있다.


나의 부모님은 내게 감정을 알려주신 적이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은 대체로 사이가 좋으셨고 지금도 서로를 잘 챙기신다. 엄마는 깔끔하고 꼼꼼하시다. 아빠도 깔끔하고 꼼꼼하시면서도 성실하시다. 두 분 사이에 안 좋은 기류가 있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어렸을 적 엄마가 아빠에게 약간의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두 분이 싸우시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엄마가 애교가 있으셔서 우리 보는 앞에서도 아빠의 볼에 뽀뽀를 하시기도 했다. 겉으로 보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난 두 분의 진짜 감정을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지 친할머니가 매우 아프셨다. 간암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친할머니의 자식들이 할머니를 돌보지 않아서 엄마가 2년 이상 집과 병원을 오가며 할머니를 간병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엄마는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셨다. 동시에 할아버지의 식사까지 챙겨드려야 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의 표정이나 감정이 기억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은 집에 엄마와 단 둘이 있었는데 엄만 내가 집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하셨는지 방 안에서 등을 돌리고 울고 계셨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엄마의 들썩거리는 어깨와 흐느끼는 소리로 엄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엄마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지금도 엄마는 내게 "힘들지?"하고 물어보신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한 달 전 친정가족들과 모였을 때 엄마가 언니에게 "힘들지?" 하고 물어보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몇 주 전 부모님이 우리 집을 다녀가셨는데 방 안에서 언니와 통화를 하시는 듯했다. 가만히 들어보았다. 엄마는 언니에게 "많이 힘들었지? 지금은 어때? 나아졌어? 차가운 물 마시지 말고 따뜻한 물 마셔" 하고 언니를 따뜻하게 걱정하는 게 아니신가. 정말 놀라웠다. 언니는 학회 참석으로 제주도에 갔는데 형부, 조카와 함께 가서 여행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니는 전날 배에 가스가 찼는지 배가 너무 아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언니는 공항에 도착해 잘 도착했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언니는 부모님에게 자주 전화를 했고 자신이 출장을 갈 때마다 어디에 간다고 늘 전화를 해왔다. 그런 언니의 전화를 엄마는 늘 반겼고 반가워했다. 엄만 그렇게 언니를 통해 행복을 느끼셨던 것 같다. 엄만 내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 배가 불러와 다리가 부어 소파에 기댄 채 다리를 쿠션에 올려놓고 있을 때에도 뭐가 힘드냐고 하셨다. 그런 엄마였는데 언니와 전화통화를 할 때 그리도 따뜻하게 힘드냐고 물어보시는 것을 보니 너무 서운했다.


나는 자라오면서 참 억울하다 생각했다. 가족들은 나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하는 말들엔 감정의 호소가 담겨있었다. 나는 항상 울부짖었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엄마는 나의 이야기에 표정이 일그러지시거나 고개를 돌리셨다. 그렇게 나는 사랑으로 크지 않았다 생각했다. 엄마의 따뜻한 밥은 먹고 자랐을지 언정 정서적 따뜻함은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셋째를 낳고는 이런 감정들을 많이 흘려보냈다 생각했는데 다시 가족과의 이야기를 떠올리니 다시금 억울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도 기억나는 건 엄마의 허벅지를 배게 삼아 누웠던 것이다. 엄마는 한 번씩 귀를 파주셨는데 그때마다 엄마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던 생각이 난다. 검은 실핀으로 나의 귀를 간지럽히고 시원하게 귀지를 빼주셨던 그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밥을 참 좋아했다. 엄마는 늘 따뜻한 국이나 찌개와 함께 고등어나 임연수, 참치 등의 생선 구이를 상에 올려주셨다. 지금도 나는 엄마의 생선 구이를 참 좋아한다. 엄마는 가끔 아침에 삼겹살도 구워주셨다. 학교 가기 전 교복을 입은 채 엄마와 나는 방에 신문을 깔고 그 위에 휴대용 가스버너를 놓고 불판을 올려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아직도 삼겹살을 구워 먹었던 그 집과 방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언니가 대학에 입학하고 온전히 방 하나를 내가 쓰게 되었을 때였다. 내 방은 바로 부엌 옆에 있어서 방 안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엄마는 그렇게 온전히 나를 위해 삼겹살을 구워 주셨다.


엄마와 나는 긴 대화가 어색하다. 내가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평소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주도적이지 않고 듣는 것을 잘하는 나이기에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어렵다. 감정이 아닌 어떤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다. 내 얘기엔 자꾸만 감정들이 섞여서 내 이야기를 피하게 된다. 다 아이들 이야기뿐이다. 나는 아직도 엄마의 대화가 그리 즐겁지도 않고 전화가 기다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따뜻한 밥을 먹고 자랐다. 엄마의 허벅지에 누워 엄마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의 따뜻한 밥도 엄마의 냄새도 사랑이었지만 엄마와의 감정교류가 없었던 것이 내겐 늘 불만이었고 불행하다 생각하게 했다. 나는 늘 어딘가를 떠돌아다녀야 했고 사랑과 관심을 찾아 헤매어야만 했다. 청소년 시절 나는 주말이면 늘 어딘가를 갔고 엄마는 내게 어디에 가는지 잘 묻지를 않으셨다. 방에서 친구와 늦은 밤까지 통화를 하면 내 방문을 열고는 빨리 전화 끄라며 눈치를 주실뿐이었다. 내가 공부를 좋아하거나 잘하지 않았기에 대학 진로도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수능 보고 내가 알아서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다. 다행히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을 택했고 부모님께도 크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어 부담을 덜어드렸다. 부모님은 왜 그 전공을 택했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다. 그냥 내가 알아서 대학에 갔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서운했던 감정들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결혼도 서둘렀다. 결혼이 나의 도피처가 될 줄 알았고 남편이 오로지 나의 편이 되어줄 것 같았다. 이런 나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정서적 결핍은 정서적 결핍을 낳았다. 나는 남편과 상의하는 법을 잘 몰랐고 혼자 결정해 놓고 숨기고 있기 바빴다. 트러블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줄 모르고 남편이 가부장적이라 생각하며 남편 탓을 했다. 결혼하고도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런 나를 남편은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제대로 해내는 게 없으니 나를 무시했다. 지금도 남편은 대화에서 자신이 불리해진다 생각하면 예전 이야기들을 꺼낸다.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 부모의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 먹이고 입히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아이를 향한 정서적 지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중요하다. 오늘 낮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정서적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출연한 부부의 사연은 아이가 밥을 안 먹는다는 거였다. 아이는 밥을 안 먹고 다 뱉어버려 엄마의 속을 썩였다. 아이는 밥을 너무 안 먹어 저혈당이 와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어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아이에게 이것저것 해주어도 아이는 먹지 않았다. 급기야 엄마는 우는 아이의 입에 억지로 밥을 밀어넣었다. 식사 식간은 흡사 전쟁을 치르는 듯 살벌했다. 전문가는 아이의 일상을 영상을 통해 관찰하며 밥을 먹지 않는 원인을 찾아내었다. 엄마와 아빠의 육아 방법이 일관되지 않았다. 특히 엄마는 호랑이 엄마였다. 아이에게 늘 명령과 지시를 했고 아이가 떼를 쓰고 말을 안 들을 때마다 매로 아이를 위협했다. 그럼 아이는 겁을 먹고 순순히 엄마 말에 따라야 했다. 아이는 늘 이렇게 겁에 질렸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늘 어딘가로 숨어야 했다. 그리고 안정을 취하기 위해 손을 빨아야 했다. 손은 하도 빨아 굳은살이 생길 정도였다. 이렇게 마음 둘 곳 없던 아이는 늘 부모의 속을 태우게 했다. 부모들은 솔루션을 위해 전문가와 함께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직접 봄으로써 부모 자신의 문제를 직면했다. 그리고 바로 코칭이 들어가자마자 아이의 모습이 급속도로 좋아졌다. 엄마가 지시나 명령이 아닌 지지를 해줌으로 인해서 아이가 안정되어 갔다. 함께 놀이를 하면서 부모가 아이의 행동과 말을 반영해주니 아이는 놀이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이토록 쉽게 금방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모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모는 직접 자신의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직면했고 바로 솔루션을 실행으로 옮겼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모님에게 서운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지금도 다 해소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부모님에 대한 상처와 원망을 흘려보내려 노력했던 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늘 부모님에게 먼저 전화를 잘 걸지도 못하고 속도 많이 썩였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내게 최선을 다해주신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늘 내 걱정을 하신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기에 부모님을 무조건 미워하고 원망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부모님도 진짜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셨던 것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엇나갈 때도 많았고 결혼생활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 나의 억울함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으로 인하여 아이에게 마음의 짐을 지어주고 싶지 않다.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흘려보내고 있는 중이다. 세 아이 모두를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아이들과 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씀으로써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독립된 삶을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 아이들을 온 마음 가득 담아 안아주고 사랑한다 속삭인다. 그럼 아이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사랑한다 답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