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리를 지나면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자신과 친하지 않으면 인사를 잘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찍이서 나를 보며 반갑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상대방이 나를 거부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교적이지 않은 나의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일까.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지내게 되니 혼자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유치원 버스를 기다릴 일이 없어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더 적어졌다.
나는 글을 쓴다는 이유로 사람들과 약속을 잡지 못했다. 먼저 만나자고 하는 엄마들도 없었다. 엄마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연락해야 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만나 나름 친하게 지내던 엄마도 있었다. 그런데 그 엄마도 일을 하게 됐고, 나 또한 글을 쓰고 책을 봐야 했기에 만나자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아이도 돌봐야 했지만,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약속을 잡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낀다.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질문을 해야 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을 원하고 어떤 감정을 느낀다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오로지 내가 아이들과 엄마의 근황을 물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별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 더 자신이 없어졌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벽에 부딪힌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음~그렇구나~ 하는 반응을 보이며 들어주어야 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걸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지만, 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 주지 않았다.
나는 혼자가 좋았고 혼자여도 괜찮았다. 하지만 사람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낼 수 있다. 나도 카페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대체로 내가 물어보고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반강제 같기도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선 혼자여도 외로워도 괜찮다. 살기 위해 버텨내기 위해 글을 쓰기 때문에 외롭다고 관계를 맺는 것은 사치였다. 나에겐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했다.
처음엔 자격증 수업 과제를 위해 글을 썼고, 그 속에 진심이 담긴 나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일기를 쓰다 블로그와 브런치를 하게 되었다. 글 속에 나의 감정을 터놓게 됐고, 글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나를 힘들게 하는 남편과의 갈등에도, 친정부모님에 대한 미움도, 언니에 대한 아쉬움도 모두 글을 통해 쏟아 놓으니 더 이상 나의 어려움에 도망가지 않게 됐다. 나를 아프게 했던 말들로 나 자신의 가치를 깎아 내리지 않게 됐다.
나를 탓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죽고 싶었다. 죽을 각오도 죽을 마음도 없으면서 괜히 끈을 보았고 베란다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젠 죽고 싶다는 마음을 갖지 않기로 했다. 열심히 글을 써서 살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보란 듯이 글쓰기로 일어나겠다고 굳은 의지를 다졌다.
공감 때문이었다. 나를 위해 울어 주었던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이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공감은 사람을 살린다. 공감은 조언도 판단도 충고도 아니다. 귀로만 듣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과 경험을 존중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가 되어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다. 꼭 같이 울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들어주고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공감이 된다.
살다 보면 나를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늘 만나게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 내 마음을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힘든 마음을 참을 수만도 없다. 참으면 병이 되고 시한폭탄이 된다. 어디에서 터질지 모른다. 길 가다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혀 싸움이 날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소한 상황에서도 감정이 폭발해 사고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공감을 한다. 글로 마음으로 대화를 한다. 글을 쓰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을 한다. 그로 인해 자기 조절 능력이 높아짐을 느낀다. 내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니 상대의 말에 실망하고 마음이 상하더라도 더 부딪히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때대로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느낌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또, 그런 느낌에 집중함으로써 혹시 그 느낌을 키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자기 공감은 그것이 어떤 느낌이든지 간에 그것을 밀어내거나(거부) 붙잡고 있지(연장)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그 느낌에 머물러 수용하는 것이다.
- 마셜 B. 로젠버그, 비폭력 대화 워크북 중에서
나를 충분히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나의 느낌과 욕구를 충분히 수용받아야 다른 사람의 느낌과 욕구를 인정하고 수용해 줄 수 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힘을 얻는다. 칭찬이나 위로만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마음들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삶은 나의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 앞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나를 책임져야 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되면 주위가 다 아름 다게 보인다. 행복해진다.
나는 원석과 같다. 보석이다. 나를 얼마든지 세공해 보석으로 만들 수 있다. 나는 글쓰기라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다 보니 글쓰기와 잘 맞았고, 쓰다 보니 재미를 느꼈다. 글쓰기로 나를 알아 가는 것이 흥미로웠고 덕분에 내가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오니 아이가 잠들었다. 나는 얼른 근처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오늘 새벽에 쓴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글을 쓰는 내가 좋다. 나는 글을 쓰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부정적으로 느껴지던 유전적 요인들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순 없다. 대물림 이란 이름으로 희망조차 느끼지 못했던 날들과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내게 주었던 선물과도 같은 공감과 자기 공감 덕분이다. 그 어떤 판단도 조언도 없이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눈물을 흘려주었다.
나의 말에 철없다, 쓸 때 없다 말했던 사람들의 말이 진짜가 아니었다. 나의 감정과 생각, 욕구는 나만의 것이었고 고유했다. 진정한 공감은 하나의 감정에 매몰되어 깊은 바닷속을 헤매었던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주었다.
공감이 보여 준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었고, 얼마든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다. 나는 그 희망이, 언젠가 꺼져버릴 풍선 속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나갈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며, 세상을 밝힐 또 하나의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 나 자신을 격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