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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달팽이 Jan 09. 2023

나의 어린 시절을 애도하며 엄마의 슬픔을 이해해 본다.

어둑어둑한 새벽, 엄마는 집 밖에 있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차가운 물로 손이 꽁꽁 얼었다. 엄마는 아빠를 기다리면서 만삭의 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빨래를 한다. 그때 누군가 호통을 치며 엄마에게 다가오고 있다.

"지금 몇 신데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빨래를 하고 있어? 남편이 깨면 어떡하라고 이 새벽에 뭐 하는 거야!"

주인집 아주머니다. 당황한 엄마는 그 자리에서 빨래를 든 채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 사이에  뭔가 축축한 느낌이 든다. 양수가 터져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출산하려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양수가 터져버렸다. 그렇게 나는 10달을 다 못 채우고 9달 만에 태어났다.


셋방 살이를 하며 근근이 먹고살았던 우리 가족은 참 가난했다. 오로지 아빠의 월급에 기대 살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할아버지께 생활비까지 드리니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엄마는 포대기로 나를 업고 한 손으론 언니 손을 잡고 도깨비 시장에서 골목에 떨어진 배춧잎을 주워다 국을 끓여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내가 태어난 해는 엄마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기억 밖엔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유독 나를 낳고 기르면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한 번 울면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나는 우는 소리까지 컸다고 한다. 복도식 아파트 맨 앞집에 살았었는데 맨 끝 집의 아주머니가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가난과 시댁의 무관심, 나의 그칠 줄 모르는 거대한 울음소리까지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엄마는 나 때문에 사는 게 힘들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부드러운 말투보다 명령적인 말투로 나를 부르는 엄마가 너무나도 밉지만 나의 출생으로 고통받았을 엄마를 떠올리며, 엄마가 나를 이렇게 대하는 대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해 본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왔을 때 갈 곳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친정부모님 집이다. 핸드폰도 두고와 연락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찾아갔다. 급히 나오느라 양말도 신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의 반응은 너무나도 냉랭했다. 여길 올 것이 아니라 경찰을 불러서 문을 열고 들어갔어야지 왜 왔냐고 다그쳤다. 당장 가라고 했다. 나는 너무나도 서러워 "그래! 간다 가! 가서 경찰을 부르든 어쩌든 내가 알아서 할게!" 하며 집을 나가려는데 엄마 아빠는 미안했는지 일단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참 많은 생각이 오갔다. 안경과 마스크 사이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들까지 다 두고 왔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젠 정말 갈라서게 되는 걸까.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원망하지는 않을지 별별 생각이 났다. 계속 반복되는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젠 정말 갈등을 끝내고 나와야 하는 건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복잡한 마음을 한 아름 껴안은 채 도착한 친정에서 부모님은 온갖 추측과 판단이 난무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평범하게 알콩달콩 하면서 잘 살아야지 왜 이렇게 사느냐고, 이젠 문제가 생겨도 이렇게 집을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서 해결하라고 모진 소리만이 집 안 공기를 가득 메웠다.


나는 그저 잠시 편안하기 위해 찾아온 건데 부모님은 내가 자신들에게 짐처럼 느껴지는지 계속해서 집을 나오지 말라는 소리뿐이었다. 오전에 찾아간 친정부모님 집에서 결국 저녁 시간을 맞이했고 아빠에게 걸려온 남편의 전화로 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춥다고 자신의 잠바를 꺼내오셨다. 거기다 발목을 덮는 긴 양말과 덧신, 바지까지 내오셨다. 아빠는 나를 안아주셨다. 어색했다. 그럼에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릴 적 받지 못했던 수용과 관심에 대한 서운함이 자꾸만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비록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부정적인 출생의 스토리에 대한 원망이 다 가시지 않아 내 삶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이젠 쏟아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꾸만 나에게 명력적인 말투로 이야기해도 그냥 넘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도 엄마의 말투가 적응이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엄마도 나를 낳았을 땐 고작 25살이었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을 마음속 고통들로 엄마가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엄마의 마음과 태도들에 나 또한 더 이상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어린 시절과 엄마의 그 시절을 애도하며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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