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자 비로소 내가 보였다.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하자 내면의 어린아이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가끔 누군가에게서 전해 듣는 진심 어린 공감과 응원의 말이 나를 힘이 나게 한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려했던 나를 다시 노트북 앞으로 오게 만든다. 그동안 수천 개의 생각과 수천 개의 글들 속에 내 글이 파묻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외롭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수천 개의 글들 속에서 내 글이 하나의 반짝이는 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웅크려 있던 내 존재를 밖으로 꺼내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공감과 응원의 말속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책을 내고 싶은 건지 생각해 보았다. 내 마음을 일기장에 기록할 수도 있고 혹은 블로그나 인스타 등 sns에 올려도 되는 것인데 굳이 나는 왜 책을 내야만 하는 걸까? 책을 낸다 하는 건 엄청난 지식을 가져야 하고, 깊은 사유가 필요한 일인데 나는 왜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심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 앞에서 잘나 보이고 싶고 멋져 보이고 싶은 욕망이 무언가를 성취하고픈 욕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 같다. 나를 봐줄 수많은 대상들 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다. 그 대상의 앞자리엔 부모님이 계신다. 결국 난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인정받는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인정받아야 행복한 걸까. 만약 내가 꿈꾸어 왔던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걸까.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가족치료교육의 일인자로 불리는 사티어는 이렇게 말했다.
자녀는 부모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녀의 정체성은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부모로부터 배운 가족규칙은 부모가 자녀를 평가하고 인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녀가 가족규칙에 따라 살아야만 사랑과 자존감 획득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녀의 개채성이 무시되고 자녀의 고유한 본질은 왜곡되며 진실한 자기가 아닌 가짜 자기를 만들게 된다.
성취의 욕구 뒤에 가려져 있던 내면 속 어린아이가 내게 속삭인다. 언제나 내 감정과 내 모든 것을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거라고. 나는 그저 당신들의 소중한 자녀라고.
마음의 성장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비교일 거다. 형제간의 비교 혹은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로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됨을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 비교를 당했던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뚜렷하게 기억되는 것이 있다. 바로 언니가 방에 들어가 공부할 때 티브이를 보던 내게 티브이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셨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티브이를 보고자 했던 나의 욕구와 티브이 시청을 통해 느끼고자 했던 재미의 감정을 무시당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티브이 소리를 줄이게 했던 엄마의 말속에 공부를 잘하는 언니를 공부 못하는 네가 방해하지 말라는, 당신의 자녀 둘을 비교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언니가 공부할 땐 조용히 해야 한다는 엄마의 규칙으로 나는 나의 욕구와 감정이 무시됨을 느꼈고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나에겐 관심이 많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부모교육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접했다. 그중 사티어의 이론을 떠올려보았다. 수업 과정이 끝이 나고 엄마와 공부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수업 과제 중 사티어의 의사소통유형검사를 해오는 것이 있었다. 의사소통유형으로는 회유형, 비난형, 초이성형, 부적절 산만형, 일치형이 있다. 엄마도 검사를 하셨고 엄마의 의사소통 유형은 초이성형이셨다. 초이성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초이성형은 내면을 차단하여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무시한다. 이들은 자신에게는 숨겨둔 감정이나 느끼는 감정이 전혀 없다고 부인하는데, 실제로는 엄청난 감정이 숨겨져 있다. 이들이 감정과 차단된 만큼 그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상황은 있고 사람은 없다. 이들은 사고 기능이 발달하고 부모와 감정교류가 많이 없었던 사람들이다.(사티어의 빙산 의사소통 중)
이 글을 그대로 읽어 드리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특히 부모와 감정교류가 많이 없었던 사람들이란 말에 더 공감을 많이 하셨다. 엄마도 엄마의 부모님으로부터 감정이나 욕구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으셔서 자신의 자식의 감정이나 욕구를 알아주지 못하셨던 것이다.
엄마도 엄마의 엄마로부터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서투르셨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다 내려놓았다. 대신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내 자녀들에게는 높은 자아존중감을 선물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인정'과 '인정받다'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인정이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심정'을 뜻한다. '인정받다'란 '확실히 그렇다고 여김을 받다.'라는 뜻으로 나온다. 즉 인정을 받는다 라는 건-능력이나 공로에 대한 인정도 있지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에 대해 상대방이 확실히 그렇다고 여겨주는 것이다.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에 대해 확실히 그렇다고 여겨주는 것.' 그것이 인정받는다의 의미로 잘 설명해 주었다. 나는 무엇이 되어서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길 바랬던 것이 아니었다. 딸로서 자식으로서 사랑받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내 존재 자체로 인정받길 원했던 마음이 부모님에 대한 미움으로 왜곡된 것이었다. 살면서 허전하고 외로웠던 마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내 감정들로 인한 상처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젠 부모님의 인정을 바라던 내가 어디서부터 오게 됐는지 정확히 알게 되어 나의 꿈이 '나' 자신으로 향하게 되었다. 일기처럼 지나왔던 일들과 그에 대한 감정들을 적어 내려 가면서 부모님의 인정을 바라는 나의 욕구를 내려놓았다. 엄마의 전화에 건성건성 받던 나는 엄마의 질문들에 허투루 답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하면서 엄마만의 사랑 방식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나, 꿈에 대한 막연함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글 쓰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고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나로 향하던 글쓰기가 독자로 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내 꿈의 서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