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 장애가 봄을 만나면
봄이 오면
아직 정확한 확진을 받지 않은 나에게 이번에 찾아온 봄은 일종의 실험과 같다. 거리에 꽃내음이 날리고 앙상하던 가지들에 새싹이 돋아나면 내 기분은 정말 돌아버릴 것 같다.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아닐지 의심이 된다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처음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 1년은 신중히 지켜보자던 선생님은 여전히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양극성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맞이 한 봄은 내게 어쩌면 공포였다. 몸의 오감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가슴속에서부터 벅차오르는 완연한 봄은 내게 극강의 희열(유포리아)을 가져다줬다.
고작 봄이 왔다고 이런 기분을 느끼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구나 봄이 오면 기분이 좋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봄은 조금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어둡고 추운 겨울이 가고 맞이 한 따뜻하고 싱그러운 봄이 반갑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장담컨대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을 하는 사람 말곤 없을 것이다.
인간도 기계처럼 생산성을 최다치로 낼 수 있나?
심지어 비염이 있는 내게 봄이 오면 내 심장은 하나가 아닌 두 개가 뛰는 것 같은 흥분감을 준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활력을 주고 생산성이 최대치에 달한다.
한 예로 새벽 5시에 일어나 영어학원에 가 영어 공부를 하고 점심에는 근처 헬스장에 가 근력운동을 한다. 퇴군 후에는 도예를 배우겠다고 학원에 등록해 2시간씩 도자기를 만들고 도예수업이 없는 날에는 공원에서 걷거나 뛰는 운동을 한다. 그리고 집에 와서야 영어학원 숙제를 하고 잠이 든다.
물론 평소에도 이런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 봄이면 다른 계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저렇게 극강의 생산성을 내는 것이다. 이전 계절까지 특히 겨울이면 방은커녕 침대 밖을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거나 그나마 지속성 있게 해 오던 일기를 쓰는 일도 겨울만 되면 뚝 끊기곤 했다.
제정신 없이 쇼핑하는 거죠
일단 의사 선생님은 내게 계절성 양극성 장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래서 보니 나의 옷장엔 봄옷이 많다. 양극성 장애에서 조증의 시기가 오면 쇼핑을 하는 갑자기 돈을 쓴다. 물론 위에 적힌 것처럼 도예학원이나 피아노학원 등을 등록해서 돈을 쓰기도 하지만 평소에 옷 사는 싫어하는 내가 유일하게 옷을 사는 시기는 봄이다. 무채색 계열의 옷만 입고 다니는 내게 유일하게 형형색색의 옷들이 생기는 시기인 것이다.
새벽 2시까지 인터넷 쇼핑으로 당장 출근할 때 입지도 못한 옷들을 10벌씩 사고 나면 나는 다음 달 카드 값은 생각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하와이안 셔츠, 반바지, 등파진 드레스가 집으로 도착한다.
한평생을 이렇게 살았어요.
매 년의 봄을 이렇게 살았으니 당연하게도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도 봄을 이렇게 맞이하는 줄 알았다. 이건 정말 심각한 환자처럼 보일까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봄에 바람이 살랑 불면 자연의 어떤 영적인 기운(봄의 요정?!)이 있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냥 내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애라 그런 거라고 여기고 있다.
이렇게 봄을 느끼며 천국을 맛보게 하고 곧장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양극성 장애인지 내 평생 알지 못했다.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다양해질수록, 내가 낙하하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땅에 부딪치는 충격을 더 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