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식구들과 이른 저녁을 먹는다.
배가 불러 해변가를 걷기로 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참 못됐다.
아직도 탓을 한다.
분명 누구의 잘못은 있다.
하지만 환경이나 상황도 한 몫했다.
그 상황이나 환경이 그때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각자의 삶에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치열하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했지만 좋은 방향으로 이끌 방법을 몰랐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 나이에 방황하고 내 삶을 어쩔 줄 몰라 힘들어 쩔쩔맸던 것처럼 부모님도 현재 나와 같은 나이에 그런 고민들을 했을 수도 있다.
가족 모두 같은 상황을 같이 겪어냈지만 각자의 처지에서 해석한 다른 기억들이 마음속에 바뀐 기억으로 존재한다. 지금도 각자의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다 쏟지는 못한다. 각자 그 속에서 찾아가려는 것들이 있었다.
동생은 부모님을 이해한다고 한다.
마음으로 절절함이 이야기 속에 묻어난다.
나는 또 내 한계를 바라본다.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내가 보인다.
그 상황을 돌이켜 부모님의 잘못만 보인다.
동생은 내가 다른 상황에서 살았다면 부모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어렸을 때의 환경 탓도 있었지만 뭉퉁거려서 엄마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환경이 많이 바뀌는 지점들이 있다.
그 지점에 놓인 나는 상황마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는 지점들이었다.
부모님의 시점에서, 나의 시점에서, 또 동생의 시점에서 ‘그럴 것이다’라는 나의 추측으로 가족의 생각을 내 위주로 다시 재판단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아프고 상처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미화시키지도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고 그 아픈 부분이라는 곳만 후벼 파고 있었다.
거기에 딱지가 않게끔 해야 하는데 그것을 계속 간지럽다고 딱지를 떼내고 있었다.
나으려면 일부러 떼내고 들추어보고 있었다.
이제는 접어두려 한다.
내가 이것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때까지.
좀 더 묵혀야 한다.
내가 제대로 재해석할 수 있는 날이 올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