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LA 한 학년을 남기고 코로나가 찾아왔다. 아들 또한 그 사이에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여 미정부 지원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딸은 LA에서 아들은 Dallas에서 우리 가족도 본의 아니게 미국서 두 집 살림이 펼쳐졌다.
다행인 것은 아들이 미군을 나온 혜택으로 정부지원으로 학교를 다니고 또 집을 살 수 있어서 집을 장만하고 있던 중이라 두 집 살림의 부담을 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유학 비용을 줄이고자 코로나 시국을 핑계로 달라스로 가족들이 모여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물론 다 큰 성인들이 모여 있으니 아웅다웅은 안 봐도 그림이다. 다들 그러지 않는가
그렇게 싸우며 버티며 공부를 해오다 드디어 딸이 졸업을 했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졸업식은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졸업생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꽃다발과 졸업장을 주는 장면을 집에서 지켜보았다. 아들 군대 수료식에는 그 멀리 사우스캐럴라이까지 직접 찾아갔었는데 딸에게는 미안했다.
졸업과 동시에 딸은 Data분석가로서 로펌회사에 취직을 하여 본격 미국에서 사회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나름 그녀 인생의 길이 빛나 보인 것이다. 애성이 강한 그녀는 그 후에도 자격증 취득과 교육에 매달리더니 1년도 채 되기 전에 Ameican Express로 이직하여 지금은 Data Product로 역량을 쌓고 있다.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데 SAFe POPM자격도 취득했다고 알려왔다.
이제 다들 자리를 잡고 나자 그제야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힘들게 공부하는 가족들에게 부담주기 싫어 내색 없이 지내며 '가난한 아빠 블라블라' 하며 나와 있는 여러 책들도 읽어가며 마음을 다잡고 지내며 어쩌다 시작한 가족유학의 고비고비를 가슴 졸이며 지내왔다.
드디어 어쩌다 내디딘 10여 년의 가족유학의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유종의 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내 환갑에는 기념으로 아들과 딸이 감사의 표시로 내가 감당하기 힘든 비싼 시계를 선물로 사주었다. '난 괜찮아 너희들만 잘하면 돼' 하시던 울 아버님이 평소 나에게 하시던 말씀을 내가 아이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다.
' 난 괜찮아 너희들만 잘하면 돼 '
돌이켜 보면 어쩌다 출발한 가족유학이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고비고비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인내하며 똘똘 뭉친 가족들의 힘이 제일 큰 것이었다.
가족유학이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내디딘 길이 목표가 생기고 고통이 다가오자 처음에는 엄마의 카리스마 아래로 뭉치기 시작하더니 커 가면서 각자의 역할을 찾아 헤쳐내는 가족의 한 기둥으로 더욱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도움주며 밀어주며 싸울 때 싸우더라도 믿고 이해하며 끌어주는 10여 년의 시간이 감사하게도 서로의 희생이 모여 유종의 미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밖으로 나가면 애국자라는 말이 있듯이 해외생활에서의 가족도 마찬가지로 가족애가 더 살아났던 것 같다. 다들 사회적 독립을 하니 지난 일을 추억으로 밀어 넣으며 대신 그 용기로 이젠 새로운 나의 도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