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내린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소나기를 쳐다본다. 저건 어찌된 것이 수천 미터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뚫지 못하고 땅에 부딛혀 부서지는가? 손을 내밀어 봤다. 내 가녀린 손 하나 구멍내지 못하고 내 손에 부딛혀 부서지고 만다. 그럴거면 뭐하러 그 높은 곳에까지 올라가서 떨어지는 걸까? 갑자기 소나기가 미워진다.
내게, 소나기 같은 남자가 있었다. 위로 위로 올라갈 수록 나를 뚫고 지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남자, 그래서 나를 그가 엮어내는 것들의 일부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남자. 그러나 그는 지금 부서지고 없다. 높이 높이 올라갔기에 그는 더 사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만 내려오라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올라갔던 그, 그는 나를 포함하여 그가 원하는 건 단숨에 엮어내려 했다. 그러면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지. 바보.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자장면집 손님과 철가방으로 만났다. 난 대충 한끼나 때울 생각으로 아무 중국집에나 들어갔던 거고, 그는 그 집 철가방 이었다. 의외로 맛이 좋아서 전화번호를 받아 집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그러고는 한참을 잊고 있었다. 한번은 대학 동아리 방에서 점심을 시켜먹자는데, 갑자기 그 집이 생각이 났다. 난 집에 전화를 걸어서까지 그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그 중국집에 식사를 시켰다. 그 맛난 맛을 친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그 철가방이 왔다. 난 사실 그때까지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철가방 중에 한명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정상이지. 우리는 한참 니체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던 중이었고 그 사이 철가방이 왔다. 어느 애가 갑자기 ’근게 짜라투스투라가 누구야? 왜 하필 이름을 그렇게 지었대?‘라고 얘기했다. 다들 들은채 만채 자장면을 까고 있었는데, 그 철가방이 대답했다, ’페르시아 고대종교의 교주인 조로아스터를 잘못 발음한 거예요.’ 갑자기 다들 눈이 똥그래 졌다. ’아니 니체를 아세요? 조로아스터는 또 뭐예요?’ 별것 아닌 단편적인 상식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다들 철가방 주제에 이런 대화에 끼어들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 했다. 철학 동아리였기 때문이다. 그 철가방은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 등을 꺼내 놓으며 짜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이지만 그 책은 조로아스터의 어록은 아니고 니체의 자작품이라는 것과 페르시아의 종교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등의 지식들과 그 책에 대한 자신의 서평을 짤막하게 말해 주었다. 약간 신선했다. 난 사실 친구 따라 거기 가입한 거지 철학에 그리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가방이라고 무식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들 놀라 호들갑 떨며 그 철가방이랑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는 좀 동떨어지게 난 자장면이나 먹고 있었다. 아침도 안먹어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도대체 철가방이 니체를 안다는 것이 뭐가 그리 신선하단 말인가? 여튼 다들 그 철가방과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는 통에 철가방은 가지도 못하고 같이 앉아 있다가 식사를 다 마친후 그 자리에서 그릇을 담아 갔다. 그 철가방이 내개 말을 걸었다.‘그 쪽은 철학에 별 관심 없나봐요?’‘아, 네, 저는 그닥…’난 곧 자리를 떴다. 점심이나 간단하게 때울려고 동아리 방에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그 철가방 이었다.‘저번에 저희 집에 와서 식사 한번 하셨죠?’ 어?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왜지? ‘한번은 더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이제 그 쪽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오면 되는 건가요?’ 아니 왜 날 한번 더 만날 거라고 생각 했으며, 날 만나러 여기로 오겠다고? 위험인물이다. 난 앞으로 동아리 방엔 오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아~네~’건성으로 대답하고 빨리 내 갈 길을 가려는데, ‘저 철가방이라고 무시하시는 건가요?’라고 한다. 휴~ 안되겠다. 똑똑히 말해 주는 수밖에. ‘저는 당신을 무시하지 않아요. 당신의 직업은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구요. 오히려 손님 많은 중국집에 한번 왔던 손님을 기억해 두다가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고 앞으로 여기로 와서 만나겠노라 얘기하는게 거의 스토킹 아닌가요?’ 그리고 쏳아보듯 그의 두 눈을 쳐다 보는데, 왠지 맘이 쓰려왔다. 저건 분명 상처입은 눈빛이다. 왜 상처를 입었을까? ‘네 죄송합니다.’라고 한마디를 하고 나를 추월해 가벼렸다. 사리를 따지자면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가해해자가 된 느낌이지? 이건 뭐지? 아~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이런 건 딱 질색이다.
몇일 뒤 집에서 중국집에 식사를 시켜 먹었다. 그 집이다. 내가 시켰다. 왠지 모르게 그를 봐야할 것 같았다. 이거 이러면 집까지 알려주는 건데, 위험을 자초하는것 아닐까? 진짜 스토커라면? 그러나 나는 그의 상처 받은 눈빛을 되돌려 놔야만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는 오지 않았다. 다른 철가방이었다. 그렇게 그에 대해선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정말로 동아리방으로, 철가방은 들지 않고 그가 왔다. 볼일이 있어서 왔단다. 그 볼 일이란 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요.’‘아,네, 제가 누군지 잊지는 않으셨군요.’이런! 눈은 더 상처가 깊어진다. 아~ 이러면 곤란하다. ‘저번에 제가 너무,,,’‘아니예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이해합니다.’‘사과의 의미로 제가 차를 한잔 살게요’
둘이 찻집에 마주 앉았다. 주로 말없이 있다가 산발적으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다. 그는 고시생이란다. 철가방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를 본 순간 심장이 뛰었다 한다. 그래서 더 보길 기대했는데 동아리 방에서 봐서 기뻤다. 뭐 그런 얘기였다. 그도, 철가방이라고 겪은 무시와 수모가 상당히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그러 중에 괜시리 내 앞이라 자기 과시를 하느라 짜라투스투라니 뭐니 몇마디 했던 것인데, 그게 오히려 더 비루한 짓이었을 것을 몰랐다고 한다. ‘이해해요. 근데 저 정말 철가방이라고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그 쪽이 다가오는게 어설펐던 거지…’
그렇게 우리는 그 날로 1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해 고시에 패스했다. 하루 아침에 철가방이 검사가 되었다.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자기야 나 너무 기뻐. 같이 기뻐해 줄 거지?’‘물론이지, 그리고 알겠지만 내게는 철가방 당신이나 검사님 당신이나 똑같은 당신이야.’‘무슨 소리아? 난 이제 철가방 같은 거 안들어. 난 대한민국 검사라구.“”그래그래~잘했어요 철가방 아저씨~하하하하’‘’하하하하‘
그는 검사가 된 이후 무척 바빠졌다. 바빠진것 외에도 그는 많은 것이 변했다. 항상 움츠러 들고 그래서 연민이 깊게 느껴졌던 그에게서는 더 이상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상처받은 눈빛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을 파고 들던 그의 소심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동아리 방이나 집의 위치를 뻔히 아는 그였지만 검사가 된 이후에는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집을 나설때나 동아리 방을 나설때 뿔쑬불쑥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고 혹여나 내 기분이 상했는지 살피던 그는 어디에도 없다. 나를 만나려 해도 꼭 어디론가 불러 냈다. 시내에 꽤 근사한 카페같은데로. 내 마음은 점점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니, 마음이 식어갔다. 그는 이미 내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어느 날, 헤어지자고 말했다. 설명하기가 너무 애매하고 난해한 일이라 그저 마음이 멀어졌다고만 했다. 그는 영문도 몰라 처음엔 난감해 했지만, 변한 그 답게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해 주었다. 이후 종종 그의 소식을 듣곤 했지만 별로 내 관심을 끄는 얘기는 없었다. 그가 어느 지검에 발령받아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이후 나도 몇번의 연애를 했고, 그도 아마 많은 여자들을 만났을 것이다. 어느 날, 점심이나 때울 겸 예전의 그 중국집엘 갔다. 그런데,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그가 거기 있었다. 그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잘 지냈어?’ ‘응’ ‘그래…’ 왜 헤어지자고 했냐는 둥 쓸데 없는 얘기가 오갈까봐 나는 얼른 계산을 하고 나왔다. 나오는 내 뒤로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생각해 봤는데,,, 자기를 좀 이해할수 있을 것 같았어. 나도 너무 큰 변화가 일어나서 너무 들떴었나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철가방이라도 들까?’ 나는 울었다. 역시, 똑똑한 사람이다. 내 마음을 이렇게 꿰뚫어 봤다니.‘아니, 난 헤어졌던 남자랑 다시 연애를 하지는 않아. 그냥,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러지 말구,,, 나 대한민국 검사야. 자기도 손해볼 건 없을 것 같은데?‘ 역시,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 그대로다. 내 마음을 꿰뚫어 봤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돌아보진 못했나보다. 난 그대로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그와의 사진을 모두 지우고, 눈물로 밤을 지샜다. 그는 어떤 밤을 지샜을까? 대한민국 검사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