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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는 마음 Jul 01. 2022

잊혀진 자들의 전쟁-8. S 병원

나균은 요즘 혈액 섭취량이 너무 적었다. 요 몇 주간 혈액을 공급해 주던 K와 연락이 되지 않아 혈액을 추가로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쟁여놓은 혈액이 다 떨어져 가서 혈액을 주문해야 하는데 K가 갑자기 잠적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나균은 직접 혈액을 조달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혈액을 합법적으로 구매하는 방법은 막혀 있으니 K와 연락이 두절된 지금으로선 훔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병원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해치며 혈액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뱀파이어는 박쥐로 변신할 수 있다고 빈스에게 들었는데 박쥐로 변하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밤중에 박쥐로 변해 날아다닌다면 은밀히 이동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도시에서 박쥐의 모습은 더 눈에 쉽게 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필요할 때 박쥐로 변할 수 있다면 혈액을 훔치는데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앞으로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 한 번 해보자.’



나균은 빈스가 알려준 대로 미간의 차크라에 집중하며 박쥐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명상과 마인드 트레이닝의 성과였는지 박쥐가 된 것처럼 상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는 방 안의 벽들이 사방으로 확 물러나며 방 안이 훨씬 더 거대해진 것처럼 느꼈다.



나균은 자신이 방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울 앞으로 날아가 보니 정말 거울 앞에 비친 것은 날개를 퍼덕이는 박쥐 한 마리였다. 자신이 박쥐의 모습으로 거울에 비치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저 거울 속에서 퍼덕거리고 있는 놈이 나란 말이지?'



신기한 것도 잠시였고 곧 박쥐로서의 감각과 움직임에 익숙해진 나균은 열린 창문을 향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보름달이 떠 있는 서울의 밤하늘은 박쥐가 된 나균에겐 신비롭게 느껴졌다. 마치 휘황찬란한 문명의 불빛 위로 고대의 세계가 펼쳐진 듯했다. 밤하늘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니 사람 이외의 존재들이 어슴푸레 느껴졌다. 나 이외에도 초자연적 존재들이 어디선가 사람들에 섞여 살아가고 있구나. 참 재미있는 세상이야..



나균은 미리 점찍어둔 S 병원을 향해 시범 비행을 시작했다. 한밤에 S 병원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혈액 팩을 훔쳐 올 때는 아버지 차를 이용해서 실어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병원까지의 경로를 미리 파악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박쥐로 변한 나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훨씬 단순해 보이기도 했다. 복잡한 인간 세상의 어지러운 관념은 머리에서 거의 사라진 듯했다. 머리가 가볍고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몸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보통 인간이 가지는 수많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감정들 - 예를 들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 과도한 자의식, 자기 연민, 질투, 열등감, 우월감 등이 사라지고,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박쥐가 되었다는 의미다. 나균은 유쾌한 박쥐가 되어 서울의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한밤중의 S 병원 건물 근처의 길가에 나균은 아버지께서 아끼던 차를 주차시켰다. 그리고 박쥐로 변하여 병원 건물의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어갔다. 그는 병원 천장 한구석에 박쥐의 모습으로 붙어서 복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간의 병원은 오가는 사람이 적어 한적했지만 복도의 불이 켜져 있어서 언제든 발견될 위험이 있었다. 사람이 안 보이는 틈을 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나균은 혈액 보관실로 가서 빠르게 혈액을 훔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혈액이 보관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균도 생각이 있었다. 흡혈귀는 사람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고 빈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빈스의 답변은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라. 그러면 최면이 걸린다’였다. 이런 모호한 방법이 어디 있나? 느껴라라니. 하지만 빈스의 답변은 그것이 다였고 다시 물어봐도 더 이상의 답변 메시지는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빈스는 외국에 있는 듯했다. 오즈에게 물어본다더니 영국에 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빈스의 말이 사실인지는 테스트해 보는 수밖에 없다.



병원에 잠입하기 바로 전날 새벽에 나균은 손님이 뜸한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나균은 들어가서 우유를 사고 계산할 때 점원에게 최면을 시도해 봤다. 나균이 남자 점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점원 자체가 된 듯이 느끼려 하자 그 순간 나균은 점원의 눈 속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균은 점원이 느끼는 당혹감과 공포를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점원의 감정이 강하게 물결처럼 밀려 들어왔다. 점원이 느끼는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 성공에 대한 열망들이 물살처럼 나균의 마음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균의 오른쪽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이건 자주 할 건 아니구나.’



강하게 느껴지던 점원의 감정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나균은 점원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나균의 뜻대로 점원의 몸을 움직여 물건을 옮기게 한다거나 말을 하게 만들 수 있었다. 최면을 끝내기 직전에 나균은 점원의 호주머니에 5만 원 권 지폐를 슬며시 꽂아주고 나왔다.



점원의 고단함이 느껴졌던 나균은 조금이라도 점원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얼마 안 되지만 그 돈으로 좋아하는 음식 사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청년의 마음에서 최면당한 경험을 지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청년에게 ‘이 순간 최면으로 인한 모든 경험을 나는 완전히 잊는다.’라는 암시를 남겼고 직관적으로 이렇게 하면 충분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균은 복도 구석에서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 한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야간 근무에 다소 지친 표정의 간호사였다. 그 간호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간호사에게 즉시 최면을 걸 수 있었다. 또한 예기치 않은 낯선 감정들이 밀려 들어왔다. 나균은 그 감정들을 조절하고 간호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간호사 덕에 나균은 혈액을 보관하는 장소에 무사히 가서 간호사가 손수 건네주는 혈액 팩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병원 건물 앞 주차된 차량까지 혈액 팩을 직접 들고 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혈액 팩을 들고 가다 다른 병원 관계자에게 발각되면 곤란할 수도 있었다.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말리는 것은 자주 경험하고 싶은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간호사가 주차된 나균의 차까지 혈액 팩이 든 상자를 직접 가져가서 트렁크에 실도록 최면을 걸었다. 간호사는 상자를 들고 충실히 명령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그리고 나균은 창문을 열고 박쥐로 변해서 사뿐히 아버지 차로 날아갈 계획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균은 창문을 열고 박쥐가 되어 날아올랐다. 그런데 창밖에서 보니 병원 건물에 아직 불이 켜진 사무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사무실 안에 의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무실 불을 끄더니 사람 같지 않은 빠른 움직임으로 무언가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불을 꺼도 사무실 안의 모든 것을 나균은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 나균의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은 극도로 발달해 있었던 것이다.



호기심에 나균이 창틀로 다가가서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남자는 각종 곤충과 지렁이로 가득 찬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긴 혀를 뽑아내더니 병 안의 곤충과 지렁이들을 맛있게 핥아먹고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을 본 나균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방 안으로 날아들어 다시 사람으로 변한 나균은 이 의사의 눈을 바라보며 최면을 걸려 했다. 그런데 밝은 달빛에 비친 이 의사의 눈은 깊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눈은 파충류의 눈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의사는 병을 옆으로 치우고 인간의 속도라고 볼 수 없는 속도로 나균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균은 그 팔을 낚아채고 의사의 배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꽤액’ 외마디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진 의사는 다시 벌떡 일어나 나균의 가슴을 발로 찼다. 약간 방심했던 나균은 일격을 허용했고 벽까지 날아가 심하게 부딪쳤다.



‘역시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나에게 이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없지.’



찰나의 순간에도 나균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었다. 쉬지 않고 의사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균은 이미 격투기로 단련된 강철 같은 신체의 소유자였다. 로우킥 일격으로 의사의 다리 한쪽을 부러뜨렸다. 또다시 이상한 동물의 울부짖음과 같은 비명을 지르며 의사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의사는 입안의 뭔가를 씹는 것 같더니 입에 푸른색 거품을 뿜어내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어금니로 독약 캡슐을 씹은 모양이었다. 이제야 달빛에 의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도마뱀의 형상이었다.



‘역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근데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균은 곧 혜수와 함께 지하 주차장에서 싸웠던 일련의 괴한들 중 자기를 습격했던 자가 도마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놈들이구나. 그런데 이놈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 중 하나인 S 병원에서 이놈들이 왜 의사 흉내를 내고 있는 거지?’



나균은 직감했다.



‘혜수를 만날 시간이구나. 안 그래도 연락할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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