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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Jun 17. 2024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외과 교수, 사회 평론

읽으며 '최고의 미술사 책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고전, 미술작품, 영화 등 다양한 소스에서 빌려온 인생에 대한 철학을 나누고 있는데, 가장 쉽게 본질을 시, 영화, 회화, 소설, 조형물에서 차용한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문화 전체를 미술사의 영역으로 다루고 있는 현재의 미술사 사조를 생각한다면 정말 최고의 미술사 책이라고 할 수밖에. 인상 깊었던 구절을 적고, 이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적어보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겠다.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그리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아무리 크게 출세한 사람도 결국에는 물러나야 한다." (p.19)


"폐허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p. 33)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p. 34)


: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는 바니타스의 미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느낀다. 


"(일본 교토 료안지의 가레산스이(枯山水)를 일컬으며) 불필요한 잡것을 비워내고자 했던 노력의 흔적이 료안지를 한층 더 선(禪)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p. 39)


"(히로시 스기모토의 작품을 일컬으며) 간명한 수평선만 남은 풍경. ... 나는 그 이미지들이 수평선을 활용해서 부재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상에서 마침내 추상으로 초월해버린 종교적인 이미지들이다."(p. 43)

히로시 스기모토, <카리브해, 자메이카>, 1980년.


"오래도록 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오는 초조함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오는 허탈감도 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사라질 내 삶의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p. 98)


"관건은 정해둔 목표의 정복이 아니라,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자기 스타일을 갖는 것이다. 

선생이 되고 나서 공부를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게 하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왜 그토록 열심히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요. 오, 그런가. 이 대답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 인간은 우연의 동물이며, 순간을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는 간명한 대답이었다. ..." (p. 103)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일을 즐길 수 있나? 윌리엄 모리스는 1879년 2월 19일 버밍엄 예술협회와 디자인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다음 여행>의 구절을 인용하며 주장한다.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말이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노동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p. 159)

... 아름답지 않은 일들이 우리 앞에 길게 놓여 있을 것이다. 이 길에 끝이 있기는 할까. 목표로 할 것은 이 하기 싫은 일을 해치우고 보상으로 받을 여가가 아니다.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 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서 올 것이다." (p. 160)

: 위리엄 모리스의 디자인철학을 비로소 알게된 듯한 느낌이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구름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 현실을 떠나고 싶은 눈에는 세상 대신 구름이 가득하다. ... 구름은 소멸의 약속이다. 구름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p. 163)

: 구름에 집중하던 사람이 해준 말이 기억난다. 구름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나라보다 기후가 다양한 지역에서는 구름을 구분한다더라. 인간이 구름을 보는 이유는 뭘까? 현실을 떠나고 싶어서 구름을 계속 봤던 것일지. 그러나 저자가 얘기하듯, 구름은 언젠가는 사라져도 언젠가는 돌아온다. 구름에 담긴 뜻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이고, 구름 자체야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귀거래사의 도연명이 구름에는 마음이 없다고 했듯이. 구름은 있었다, 없었다 반복하며 산정에 얽매여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 훨훨! 자유와 안정을 찾기를 바란다. 


"소식(소동파)은 '대상에 뜻을 길들여도 되지만, 뜻을 대상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그 대상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 인생을 즈리곡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pp. 272-274)

: 나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말. 마음의 중심을 잘 잡자.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 평상시 내가 생각하던 것과 정확히 똑같다! 나는 내가 실패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로 삶을 사는 건 아닌가 고민했었다. 너무 자세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결국 실패를 수용하지 못하게 만드니까. 근시안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치중하며 사는 것을 마음 먹었다. 저자도 단기적 목표, 동선과 좌표는 가져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산책은(= 삶을 사는 태도)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라고 말해주고 있다. 오예. 


"그 어떤 것도 결국 시간과 더불어 지나간다. ...예술가 또한 변색이 와도 감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을 그리거나, 변색 가능성과 더불어 살아갈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려면 일단 시간의 풍화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 특정 정당은 물론 한국이라는 정치체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세속의 정당이 의로운 위상을 지속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은 활력을 빼앗고 권태와 나태와 관성과 타락을 남겨준다."

: 역시 정외과 교수 아니랄까봐, 저자가 가장 매력을 드러내는 포인트는 정치 관련해서다. 그는 정치와 연애, 미술을 비교하는데, 여러가지 스쳐지나가는 예시들이 많이 생각난다. 그렇지, 아이돌도 도덕성 어필은 언젠가 끝을 본다고 하지 않나. 딴 말인데, 나는 정치는 도덕과 직결되는 줄 알았었다. 마크롱의 스승이 "쟤 지금 노선 선택하지 않고 뭐하냐, 차라리 마리-르펜처럼 한쪽으로 틀든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고 비판할 때까지. 그때 깨달은 것은... 치수는 도덕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지지자는 다르다. 지지자는 도덕성을 필두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변색 가능성, 타락의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한다. 마음의 중심을 잡자는 것도 여기에 적용되겠네요. 



책 마지막에 소식의 <적벽부>가 부록으로 들어 있다. 1082년의 글이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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