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시어머니께서 "너희 부부가 이렇게 사이가 좋은 건, 우리 가족 8명이 모두 노력했기 때문이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8명은 나, 남편, 친정 엄마, 친정 아빠, 내 동생,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가씨 이렇게 양가의 구성원을 의미했다.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8명 중 누구 한명이라도 삐뚤어졌다면 양가의 평화를 떠나 우리 부부 사이에도 평화는 없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우리 부부 사이에는 Family Problem이라고 할 만한 이슈가 딱히 없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1년에 한번 꼭 모임을 가지시는데, 그 때마다 엄마들은 언니, 동생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아빠들은 딸들에게, 와이프에게 구박 당하는 신세를 함께 한탄하며, 각자가 잘 키워서 보내 준 큰자식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전하시곤 한다. 특별한 날 서로 안부를 전할 때면 늘 서로 '사돈, 너무 보고싶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러블리한 사돈 관계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 모두 분명, 서로의 자식에게서 느끼는 부족함도 있으실 것이 분명한데도 단 한번도 당신들의 딸이, 아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늘 어쩜 이런 딸을, 아들을 키워서 주실 수가 있냐며 서로에게 감사하시고 서로의 자식을 칭찬하셨다.
나는 우리 아가씨와 자매처럼 지내고, 남편은 내 동생과 남매처럼 지낸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서운한 일이 있거나 싸웠을 때 각자 부모님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아가씨에게, 남편은 내 동생에게 이야기를 하며 해소하는 부분이 많다. 우리 부부보다 의젓한 두 동생들 역시 부모님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절대 전하지 않는다. 그저 아가씨는 내 편이, 내 동생은 남편 편이 되어줄 뿐이다. 아가씨에게 나는 자신의 멘토이자 어떤 상황에도 자기 편인 큰 언니고, 내 동생에게 남편은 내 언니를 살린 생명의 은인이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형부다.
시어머니 말씀이 백번 맞다. '우리 가족' 8명이 서로에게 좋은 가족이 되기 위해 모두 노력하고 있기에 우리 부부가 이렇게 사이 좋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거였다. 너무 당연해서 몰랐던 것이다.
우리 남편이 친정 식구들과 심각할 정도로 잘 지내는 것은 앞서 이미 너무 자랑질을 했으니 패스하고, 나 역시도 시댁과 남편만큼 잘 지내는 편이다. 예쁘고 좋은 걸 보면 우리 엄마, 아빠와 함께 우리 어머님, 아버님도 떠오르고 불연듯 보고 싶고 그렇다.
시댁에 가면 사실 내 세상이다. 어머님이 차려주신 밥을 얻어 먹고, 심지어는 뭐가 먹고 싶다고 요구도 한다. 과일도 간식도 날름날름 받아 먹으면서 오랜만에 집에 온 딸네미 마냥 소파에 늘어져서 굴러다니다가 소가 되기 일보 직전에 일어나, 아버님 옆에 찰싹 붙어서 2~3시간 수다 떤다. 간혹 '시어머니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고 연기를 하려고 하면 '대체 왜 갑자기 시어머니 코스프레인 거냐'며 아가씨와 편 먹고 이미 어머님을 놀린다. 음...써놓고 보니 게으르고 싸가지 없게 엄마만 부려먹는게 진짜 딸 같은 며느리네 내가. (웃음)
그런 며느리를 소처럼 뒹굴게 두신 우리 어머님은 2년 전부터는 그야말로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하신다. 2년 전, 어머님도 나와 같은 유방암에 걸려 항암과 수술을 경험하시게 되었다. 그 때 어머님의 고통스러운 암 투병 속에서 시부모님 내가 암 투병을 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너무 챙기지 못했다며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셨다.
세상에 어떤 분들이 이럴 수가 있을까? 당시 암에 걸려서 힘든 건 어머님 본인이었는데, 멀쩡한 나의 과거에 대해 가슴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게 말이 되나?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위로하고 그걸 잘 이겨낸게 대견하다는 시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선 담담한 척 괜찮다고 했지만, 집에 와서 오래토록 울었다.
이게 부모구나, 자신들이 힘드신 상황에도 자식의 힘들었던 마음을 살피는 게 먼저시구나, 나는 우리 시부모님에게 진짜 자식이 된 거구나 하는 감동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시댁과 이렇게 편하고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어색함도 많았고 티격태격하는 사건들도 있었고 서로 맞춰가는 시간들이 존재했다. 모든 가족이 그러하듯, 남편과 친정도, 나와 시댁도 우리 가족들 모두는 서로 티객태격하는 시간 속에 우리 가족 만의 해법을 찾으며 더욱 단단해져왔다.
사실 우리 시부모님께 나는 미지의 생물이었을 것이다. 아들에게는 처자식의 부양의 당연함을, 딸에게는 현명한 내조의 당연함을 가르치신 분들에게, 갑자기 등판한 며느리는 남자건 여자건 능력있는 사람이 더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해야 하고 동반자적인 부부 관계에서 남녀의 역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급진적 사고를 가진, 다루기 어려운 난제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이 집안 일을 하는 것도, 내가 남편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것도 한동안 속상해하셨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부모님은 변화를 수용할 줄 아는 분들이셨다. 본인들이 반세기 이상 가지고 있었던 남녀의 역할론을 스스로 탈피하셨다.
어느 순간부터 더 열성적이고 꿈이 많은 나를 도우도록 남편에게 권하셨고, 언니처럼 더 주도적이고 치열하게 일하라며 아가씨에게 조언하셨다. 남편에게 남자인 네가 더 벌어야 한다, 아가씨에게 얌전히 있다가 시집 가라던 시부모님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물론 11년이 넘는 시간이 나를 며느리에서 큰 자식으로 탈바꿈한 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시부모님이 변화를 수용하는 분들이 아니셨다면 나는 지금도 며느리에 머물러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이 집의 큰 자식은 내가 맞다고 말이다.
최근 난소암 이슈가 생긴 나에게 시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이를 가질 생각도 했고 그래서 항암할 때 그 무서운 주사를 맞으며 난소를 지킨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제는 네 몸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때문에 큰 자식을 잃을 수는 없다. 가족들을 위해서 포기해줘라. 니가 살 수 있는 결정을 해다오."라고 말이다.
나보다 소중한 건 없다는 절절한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그래 이렇게나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부모와 자매를 얻었는데, 자식은 얻지 못하는 게 억울해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청혼해준 남편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되었다. 만약 남편이 나에게 권하지 않았다면 나는 비혼주의자로 살아가며 남편은 물론 우리 어머님도, 아버님도, 아가씨도 이 소중한 4명의 새로운 가족을 내 삶에 영원히 얻지 못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