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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여섯째 날 비오는 날과 장칼국수

by 준환

8.8. 월, 비


비오는 날


대관령 선자령으로 출발하기 위해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이미 환한 빛이 스며들었어야 했으나 아직 방안이 어둑한 게 비가 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더 누워있다가 같이 갈 일행 기척에 일어났다. 유리창에는 빗방울이 쉼 없이 맺혔고 창밖 먼 산은 안개가 가득했다. 하는 수 없이 취소하고 아이들과 실내 갈 만한 곳을 찾았다.


하슬라아트월드는 정동진 가는 바다 가까운 길에 있다. 꽤 가파른 오르막 비탈 끝,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층층이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회화, 모빌, 조각 등 다양한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에곤 실레 판화 작품과 현대 회화를 포함한 조형물 구간을 지나면 고래뱃속을 연상케 하는 주름진 통로가 나타났다. 피노키오가 주제인 키네틱아트 관이다. 금속과 나무를 이용해 만든 정교한 작품은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작동해 보고 싶은 유혹을 일으켰다. 손잡이를 돌리면 지느러미가 위아래로 움직여 날아갈 듯한 나무 고래가 특히 그랬다. 건물 외벽을 따라 무심한 듯 만들어진 철제봉 계단을 따라 바다를 보며 처음 시작한 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곳에서 위쪽 언덕에는 야외 전시장이 있었다. 여러 설치물에서 해시계 같은 모양의 흙 둔덕이 가장 흥미를 끌었다. 시간을 가리키는 파이프 모양 바늘은 아래로 향하는 어두운 계단이 숨겨져 있었다. 호기심만큼 겁이 난 아이는 아빠를 앞세워 탐험대장이 되었다. 조심조심 내려간 둥근 터널은 반대편 밝은 출구로 이어졌고, 두려움을 이기려 함께 노래 부르며 두세 번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싶었으나 아이들에게 만족이란 없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계속된 후에야 끝이 났다.


오후 세 시. 다시 영진해변으로 갔으나 비가 내렸다. 소낙비는 아니었으나 제법 굵은 빗줄기가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물에 들어가겠다고 졸라댔다. 곧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갔다. 아이 둘과 나는 처음 망설였으나 이내 차가운 물에 익숙해졌다. 한참 동안 술래잡기, 모래놀이를 하다가 한 마리 거북이처럼 번갈아 등에 태우고 이리저리 떠다녔다. 오늘도 폐장할 때가 다 되어서야 물 밖으로 나왔다.


예니 가족 마지막 밤. 첫날, 다섯 밤은 끝나지 않을 시간으로 느껴졌으나 돌아보면 눈 깜짝할 새였다. 이번 주말에 방이 비어 다시 오라고 했다.



8.9. 화, 흐린 뒤 비


장칼국수


강릉에는 고추장을 풀어 걸쭉하게 끓인 칼국수 집이 많다. 오래 전 동해시에서 처음 맛본 기억이 깊게 남아 여행 첫날부터 궁금했다. 식구들만의 첫 외출 길 가까운 식당에 들렀다. 왕OO칼국수는 가건물에 있어 음식점이 맞을까 싶도록 허름했다. 비닐 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는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아 한구석을 골라 앉았다. 우리는 장칼국수 두 그릇, 매운 음식 못 먹는 아이에게 줄 공깃밥을 하나 시켰다. 한 그릇에 팔천 원, 싸지 않은 가격에도 인기 있었다. 열두 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음알음 찾아온 관광객 한두 자리 빼고는 현지 사람들로 거의 찼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맵싸한 국물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찬으로 열무와 무생채가 먼저 차려지고 곧 칼국수가 나왔다. 생각보다 맑은 국물은 맵지 않았고, 좋아하는 된장 맛도 느껴져 연신 국물을 떴다. 뒤이어 한 젓가락 집은 면은 적당한 굵기에 손 반죽 느껴지는 찰진 식감이 마지막까지 처음 그대로였다. 말린 버섯, 황태 채, 호박, 채 썬 김 등 다른 곳보다 다양한 고명은 국수 한 그릇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한 시가 아직 되지 않았을 무렵 손님들이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모습이 의아했다. 계산하며 주인에게 슬며시 물으니 벌써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한다.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지만 끝나는 시간은 준비된 반죽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었다. 좀 더 길게 장사해도 손님이 끊이지 않으련만 맛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개인의 여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 비 오는 날은 숙성된 면이 적어 이른 시간 마치고 맑은 날은 더 길게 문을 여는 데 평균 오십 그릇 정도 판다고 했다.


아르떼뮤지엄은 풍부한 음향과 함께 자연광으로는 느낄 수 없는 화려한 인공 불빛이 넓은 벽면을 가득 채웠다. 테마관은 겨울 숲속의 백호, 힘찬 폭포수, 유리 벽 너머 꽃밭의 잠자리, 번개와 파도 등으로 꾸며졌다. 가능한 모든 빛으로 이루어진 영상은 강렬하고 생기 넘쳤다. 아이는 역시 체험에 가장 관심 가졌다. 동물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에 원하는 대로 형형색색 칠하고 스캐너로 입력했다. 나무와 풀밭이 배경인 화면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 눈빛은 여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 한참을 몰두해 호랑이, 거북이, 새 여러 장을 그려 영상으로 띄운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구로 가기 전 정원이란 이름의 전시관은 풍경 사진과 명화로 가득했다. 밤을 배경으로 수백 개의 풍등이 하늘로 올라가며 아리랑이 울려 퍼졌고 클림트의 그림 수십 점은 레퀴엠 라크리모사와 함께 사람만 한 크기로 벽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미술관 아닌 곳에서 만난 작품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한동안 서 있었다.



지방에서는 항상 전통시장에 들른다. 강릉중앙시장에서 닭강정과 과일 조금을 사고 나오는 길 우연히 샌드 과자 가게를 만났다. 제주살이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만 파는 걸 사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라 무척 반가웠다. 아담한 크기를 반으로 가르니 고급 버터와 크림치즈, 커피 스프레드가 어우러져 풍미가 좋았다.


돌아오는 길 경포호에 있는 가시연 습지로 갔다. 늪지에 떠 있는 가시 돋친 연잎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식생이었다. 습지를 천천히 한 바퀴 걷고 싶었으나 비가 굵어져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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