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이맘때쯤 북큐레이션 1, 2급 이론 공부를 하고 한 해동안 교실에서 첫 번째 실전을 치렀다. 금요일 저녁 8시,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이곳 책방 모임에 기꺼이 참석하게 된 것은 팀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네 책방에서 먼저 팀원을 구한 것이지만 말이다. 독서 모임도 온라인으로만 참여하고 오프라인 모임은 신유진 작가에 대한 팬심으로 딱 한 번 가본 내가 오랜만에 낸 용기였다.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즐거운 만남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약속이 성사되면 기쁘지만 취소되면 한층 더 기쁜 내향형 독자의 삶이여!
신청하고 나서는 바쁜 3월 일정에 밀려 나는 그저 둥둥 떠다녔다. 어쩌면 그런 달뜬 마음에 조금 설렜던 것 같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공간, 새로운 기회. 어쨌든 나는 작년의 전철을 다시 밟으면서 빙빙 돌다 제풀에 지쳐버리지 않아도 되지 않나. 그런데 슬슬 모임이 다가오니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겪어본 만큼 알지 않나. 하지만 적어도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나는 덜 외로울 것이다. 경험은 여기에 모두 기록될 것이다. 기쁨도 실망도 감동도 허무도. 그 사실이 기쁘다. 작년과 달라진 점은 이렇게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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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책방으로 모였다. 몇 명이나 모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쭈뼛쭈뼛 거리며 책방에 들어섰다. 책방 대표님(호칭은 이렇게 통일하기로 했다)은 알록달록 티백과 컵들을 내놓으시면서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SNS 계정에서 봤을 때는 눈매가 날카로운 카리스마형이실 줄 알았는데 아주 다정하고 밝은 에너지를 품고 계신 분이었다. 우린 하나둘씩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 12명이 모이기로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한 사람은 7명. 한 바퀴씩만 돌아도 시간이 후루룩 지나갔다. 금요일밤 8시라는 시간 때문인지 대표님은 짧게 끝내겠다는 의지를 다졌지만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는 밤을 따라 깊어졌다.
한 차례 자기소개를 끝내고 나서, 요즘 읽고 있는 책과 뾰족하게 맡을 분야를 말해보기로 했다. 7명이 돌아가며 자신의 책 취향과 최근의 독서, 자신만의 분야에 관해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어떻게 이토록 관심분야가 다양하면서 겹치지 않는지 놀라웠다. 이를테면 농사를 짓는 전직 국어교사는 현직 숲해설사와 생태라는 주제로 겹치는 것 같았지만 각각 과학과 인간관계로 제자리를 찾아갔고, 어쩌면 세계문학으로 뭉뚱그려질지 모르는 지점에서도 각각 고전, SF로 나뉘었으며,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피철철 흐르면서 개연성도 확실한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와, 전혀 다른 느낌의 미스터리나 판타지 쪽으로 갈리는 식이었다.
각자 직업도 취향도 다르고 좋아하는 책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건축 인테리어를 업으로 하는 고등학생 엄마이거나, 퇴직을 했거나, 일이 N개이거나, 숲 해설사를 하면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기도 했다. 나처럼 인덱스를 붙이는데 진심인 사람도 있지만 파워J의 면모를 보이는 기록형 독자도 있는 법.
"이 모임이 독서모임이었다면 전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이 하시는 모임이 아니었다면 12명이나 되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을 거예요."
독서모임에 세 번이나 도전했다가 모두 실패했다는 K와 극내향형이라는 또 다른 K가 각자의 소회를 밝히며 이 모임의 취지를 더 밝혀주었다. 나부터도 여기에 책을 읽으려 온 것은 아니다. 7명은 각기 관심도 다르고 성향도 달랐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수용하는 따뜻한 면모를 보였다. 나는 책방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별다른 설명 없이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우리는 분기별로 모이기로 하고 6월 말쯤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때까지 온오프로 자유로운 방문과 만남이 있을 것이고 추천할 책들을 공유하는 등 미션도 있을 거라고 했다. 5월쯤엔 큐레이터 12인의 책을 전시할 공간을 책방에 마련하신다고 하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나는 글쓰기와 기획 파트를 맡기로 했다. 내년 초에는 큐레이터전도 여실 계획이라고.
다른 지역에서도 신청이 잦았을 만큼 나름 참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올 한 해의 큐레이터 활동을 매주 조금씩 적어보려고 한다. 팀원이 생겨서 날개를 얻은 듯하다. 무엇보다 동네 책방이 잘 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북큐레이션을 공부한 이래로 처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