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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Apr 19. 2024

독자의 오만과 편견

큐레이터의 시선


"저는 피철철  리얼 스토리가 좋아요. 여성작가가 쓴 글은 잘 안 읽히고 남성작가가 쓴 글이 잘 읽히더라고요."


"에세이는 남의 일기장 읽는 거 같아서 별로예요."


"SF는 좋아하는데 허무맹랑한 뜬 구름 잡는 거 말고 땅에 발 디딘 사실적인 SF가 좋아요."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제 관심과 취향이 생기는 법인데, 독서에 진심인 사람어련할까. 나도 한 때 자기 계발서는 제대로 된 한 권 외에는 읽지 말라고 권했던 사람 중 하나니까 사람은 언제나 제 몫의 취향을 목숨처럼 움켜쥐며 산다. 요즘은 관점과 취향이 개성이고 능력인 시대니까.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문장들은 내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책들로 둘러싸인 서재를 가졌든,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든 우리는 독자다.


잠재적 독자. 


하지만 한 가지 더 덧붙일 수도 있겠다. 


변화무쌍한, 잠재적 독자. 


우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될까?

생각도, 상황도, 관점도, 취향마저도.


국어교육을 전공한 K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그 문장을 들었을 때 말이야..."

"에세이는 남의 일기를 읽는 것 같다는 말?"

"응.. 그게 무슨 말일까? 책이랑 마주 보면서 듣거나 이야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위에서 책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난 거 같았어. 무언가에 지나치게 열광해서 신격화해 버리는 사람을 봤을 때의 기분이랑 비슷해."

"흠.. 에세이를 남의 일기를 읽는 거 같아 지루하다고 말했다면 그건 좀 오만한 거 아닐까?"

"왜 책을 읽는 걸까? 내가 다 안다고 믿었던 일상을 새롭게 보려고, 아니면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듣고 싶어서 아닌가?"

"그게 에세이의 본질이지."

 


책, 너무 믿지도 너무 닫지도 

사람에겐 때가 있다. 돈을 못 번 사람만큼 시간을 못 버는 사람도 많다. 제 때에 제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산다. 우리는 시간에 돈을 지불한다. 시간에 모인 지혜를 헐값에 구한다.


시간 __________.


1. 기다려주지 않는다.

2. 쌓인다.


이 두 가지 속성은 서로 상충하는 듯 하지만 책 속에서 같은 의미로 읽힌다. 책은 집단 지성이 쌓여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가치가 소멸되기도 한다. 시간을 그저 지식과 지혜를 담는 그릇으로만 치부한다면 책은 언제든 더 근사한 디지털 기기로 대체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보다 더 아날로그적 존재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서 축적된 데이터들은 서로의 상호데이터가 되어주면서 힘을 발휘한다. 서로의 인용구가 되어주고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해 최대한 차가운 논리와 따뜻한 태도로 말을 건넨다.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힘을 갖는다. 시간이 지나 당장 가치가 소멸한 책마저 이전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책을 읽읍시다!'라는 구호에는 '우리는 모두 글을 읽고 이해할 능력이 있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책을 사는 일, 책을 읽고 이해하는 일부터가 전제되지 않은 시대가 앞서 있었고, 우리는 이제 모두가(아무나.. 는 아니지만) 책을 쓰고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책을 신성시하고 압도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는 책을 하대 하기이다.


언젠가 한 학생이 내게 영어를 왜 배우냐고 물었었다.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올랐지만, 나는 단 하나만 답했다.

"영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그리고 덧붙였다. 영어를 잘하게 되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그들을 우러러보거나 찬양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할 있을 거라고.


, 읽기, 독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취향이 생다. 책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책에 대한 취향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담을 쌓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책이 아무리 대단해도, 독자를 앞서지는 못한다.



내가 사서 읽고 싶은 책, 그게 다 일까? 

도서관이나 오프라인 서점에 가야만 하는 독특한 경험이 있다.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엔 구입할지도 모르는, 혹은 결제하려고 마음먹은 책들이 가득하다. 물론 여기저기서 추천을 받았고 화제성이 짙은 책들이며 현재의 고민과 맞닿아있기 때문에 구입해도 대부분 후회가 없다.


그런데, 없다.


도서관이나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그중 일부는 없다. 모든 책들을 가져다 둘 순 없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찾는 책이 없을 때 비슷한 주제로 여전히 끌리는 책을 찾게 될 기회가 찾아온다. 도서관이나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책을 찾았다면 더더욱 그런 기회를 잡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관심 주제의 책 주변을 기웃거리다 보면 그 옆에 혹은 그 위나 아래에서 예상치 못한 인생책을 마주할 수도 있다.


서재 사이의 세계는, 인생만큼이나,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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