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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마음 쓰는 시간 세 번째 이야기: 푼크툼

by 뭉클


진짜가 더 가짜 같고, 가짜는 진짜 진짜 같은 SNS 세상에서 진지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에는 없는 종이와 질문과 디자인을 계속 마음에 품어도 될지, Like를 덜 받더라도 인기 없는 나만의 철학공부를 계속해나가는 게 맞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느니 나 다운 모습으로 미움받는 게 낫다는 말은 그들에게 아직 소화되지 않은 단백질 같은 것. 이 개별적이고 고독하게 개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귀한 경험을 마주하면서 '푼크툼(Punctum)'을 떠올렸다.


푼크툼은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빌린 개념어인데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뜻으로, 사진을 봤을 때의 개인적인 충격과 여운의 감정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그러니까 사진가의 의도가 담긴 코드로 사진을 바라본다면 그건 스투디움이다. 별 예외 없이 우리가 거뜬히 해석해 내는 것들.


반면 똑같은 사진을 보고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찌르듯 꽂히는 것이 푼크툼이다.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고. 사진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우발적인 하나의 사건.


진은영 시인은 이런 푼크툼의 개념을 문학상담의 시 치료에도 적용했다. 나만이 겪는 체험이지만 보편성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꽂힌 부분에 다른 사람도 꽂힐 수 있지 않을까. 푼크툼은 폐쇄, 경직된 것이 아니라 전달, 공유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 진은영 / <금지된 재현>, 르네 마그리트


시를 읽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 걸까. 표준적인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층위가 있지 않나. 각자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하고 풍부해지면 더 좋은 일 아닌가.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고전처럼, 인생도 그렇게 연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생은 연극 같다. 오늘의 대사와 오브제, 관객만 있을 뿐. 가장 중요한 건 연기를 할 나 자신. 거울에 비친 나를 볼 때마다 나는 '진짜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란다. 죽을 때까지 못 볼 '진짜 나.' 그 사실은 나를 혼란스럽게도, 가볍게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자기기만이 들어간다. 그러니 이상화된 나를 억지로 끌어다 붙인 들 '진짜 나'와 더 멀어지기만 한다.



이 글을 쓰던 날의 푼크툼 94 세 가지 것




103

네가 서 있는

땅은

두 발이 서 있는

땅의

면적만큼일 수밖에 없다는

행복을 이해해라.


115

오직 한 단어.

오직 한 가지 소원.

오직 한 번의 공기의 움직임.

오직 하나의 증거,

네가 아직 살아 있고 기다린다는.


아니, 소원은 필요 없다,

오직 한 번의 호흡,

호흡은 필요 없다,

오직 한 번의 준비,

준비는 필요 없다,

오직 한 가지 생각,

생각은 필요 없다,

오직

편안한 잠.


세계시인선 58『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프란츠 카프카(번역: 편영수)





That Love Is All There Is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세계시인선 11『고독은 잴 수 없는 것』

- 에밀리 디킨슨(번역: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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