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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쉼보르스카

마음 쓰는 시간 두 번째 이야기: 다시 쓰기

by 뭉클


메리 올리버가 내게 사의 빛을 남겼다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다시 쓰기 나를 구했다.

(찰스 부코스키와 매번 헷갈리는 나를 용서하오.)


담백한 영양식보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한 캠페인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먹는지 말해줘요. 당신이 누군지 알려줄게요.'


프랑스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가 쓴 한 소설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무엇을 싫어하는지 말해보세오.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테니.

당신이 누구인지는 '당신이 누구인가요?'라고 물어서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당사자도 몰라서 알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관한 시를 쓰면서.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얻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선택의 가능성>,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쓰기 가이드(ft. 공강시간에 일 만들어서 하는 담임)

1. 시인은 어떤 사람일 것 같아요?

2. 시의 문형인 '나는 ~를 좋아한다'를 그대로 두고 자신만의 시로 바꿔 써봅시다.

3. 패들릿에 공간 마련해 둘게요. 분량은 자유이지만 최소 10줄은 써보세요. 구체적일수록 좋아요. 개인적인 TMI일수록 더 좋아요.

4. 너무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어요. 다 쓰고 나서 친구들이 궁금해하는 구절은 질문할 수 있도록 댓글 열어뒀습니다.

5. 학급 특생활동입니다. 한 명 한 명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공부와 진학상담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베리 임폴턴트 인포메이션.



이 시를 6월에 한 번, 12월에 한 번 쓰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을까? 반복되는 문형이 있는 시를 찾아보는 건, 다시 쓰기 활동에 도움이 된다.


교실에서 학급운영을 하다 보면 개입할 수도 개입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인간관계의 갈등에 관한 문제들은 우리가 아직 익어가는 중이라는 걸, 지금 여기서 내가 보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당사자 외에 그걸 지켜보는 사람마저 모를 때 미해결 과제로 남는다.


잔뜩 심각해서 눈물을 질질 짜다가도 덩달아 심각해진 어른들 앞에서 금세 해맑아지는 아이들을 보면 어디까지 읽어주고 어디까지 흘러가야 하는지 난해한 지점이 있다.


내담자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담자도 하나의 성장체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낯선 개인을 발견한다. 알지 못한다고 내가 알을 깨고 날아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더디긴 해도 우리는 살아내면서 배우고 나아진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상처로 남는다. 더 나은 선택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놓여있다. 개입하지 않으면서 개입하는 법은 더 나은 선택을 돕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솔직하고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다음엔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여,.............

..... 여,.............

..... 여,.............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걸 너무 노여워 마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이 점차 희미해진대도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용서해 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용서해 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 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린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너무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 달라.

영혼이여, 내 안에 자주 깃들지 못한다고 나를 질타하지 마라.

모든 것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 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짜 맞추고 있는 나를.


<한 개의 작은 별 아래서>,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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