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든다
솜털 같은 눈밭, 할퀴는 눈발을 뚫고 퇴근한다. 열심히, 바르게 살아가는 건 에너지가 든다. 밀가루 음식과 초콜릿을 줄이고, 아침 공복에 유산소 운동을 하고 뿌듯해하던 루틴은 글쓰기 루틴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다. 얼마 전까진 주 2회 러닝머신 위 혹은 집 주변 러닝존에서 10km. 요즘은 노트 위에서 펜으로 달린다. 글쓰기와 체력. 어느 하나 덜 중요한 것이 없다. 에너지와 시간을 재분배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몸의 에너지는 삶의 에너지이고 활력이 부족하면 사변思辨으로 가득 찬다. 살도 차오른다.
숨에 집중하다
요가에는 사바사나라는 말이 있다. '잠시 멈춤'이라는 뜻인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어내고 근육을 이완시키는 이 동작은 아주 낯설고 반가운 느낌을 준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 그것말고 집중할만한 게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요가의 끝엔 언제나 사바사나가 나를 기다렸다. 몸을 움직이려고, 집중하려고 한껏 끌어올렸던 에너지를 팔 끝과 다리 끝으로 보내 몸 전체에 안정적인 신호를 보낸다. 사바사나에서 '사바'는 시체, '아사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송장처럼 누워 이완된 양 어깨, 바깥으로 편하게 뻗은 발 끝을 느낄 때면 눈물이 났다. 매번 문을 열고 나가면서 했던 말. "아, 행복해." 어릴 적 내게 인색했던 그 말을 수도 없이 했던 걸 보면 정화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가는, 아니 어떤 운동이든, 아니 어떤 일이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면 늘 근력이 필요했다. 아니면, 심폐지구력이거나.
러닝은 운동 신경 없고 체력은 더 없는 나에게 꽤 괜찮은 운동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저질체력이 아니었다.) 순발력보다 지구력으로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호흡이 수시로 흐트러졌다. 짝꿍은 내게 일정한 '숨'이 가진 힘을 알려주었는데, '헛둘, 헛둘' 호흡을 일정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멀리까지 가게 하는지 그때 알았다.
힘을 빼다
20대 중반, 수영에 입문했다. 입과 귀에 물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처럼 임하니 자꾸 목이 들렸고 툭하면 가라앉았다. 물을 반쯤 먹고, 귀가 멍멍해지자 반쯤 포기하고 물 속으로 가라앉기로 결심했다. 대신 팔과 다리를 좀 더 잽싸게 휘젓기로. 물 속에 잠겨 웅웅거리는 소리는 지금 생각하면 고요함에 가깝지만, 그땐 두려움이었다. 조금 허탈할 정도 나는 금세 물 위에 떠 있었다. 살면서 일이 안 풀릴 땐 물 위에 둥둥 뜨던 그 때를 떠올린다.
"또 힘이 잔뜩 들어갔군."
일터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에게 고운 말, 배려, 나눔, 도움을 기대하고 그들이 내게 유리한 방식으로 행동하리라는 비합리적인 믿음과 기대를 갖는다. 다시 긴장. 모든 주제에 능통하려고 온갖 좋다는 아이템을 다 갖다 넣으면 모든 주제에서 실패한다. 모두를 이해하려다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 남은 한 명, 나 자신조차도 이해받지 못한다. 이런 무모한 나. 다시 좌절.
"또, 또, 쯧쯧.."
힘이 깃든다
컴퓨터 화면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신, 노트에 펜으로 글을 쓴다. 글은 요가이고, 달리기다. 수영이고, 마음 수련이다. 쓰는 동안에는 내 안에 든 독과 복에 모두 골고루 집중할 수 있다. 꾸준히 매일 쓰는 삶에 일정한 리듬이 흐른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어 익사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물 좀 먹더라도 어떤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다. 우린 기부는 커녕 기브앤테이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받고도 받은 걸 모르고, 주는 족족 생색을 내고 싶어하니까. 어쩌면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해본 적이 있던가. 나 자신조차도. 완벽하게 불완벽한 채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 앞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 글쓰기와 몹시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