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 글쓰기 군살 제거하기
글쓰기 방향 : 구상 잡기
퇴고 방향 : 분량 조절, 감정 덜어내기, 미친 퇴고
1단계에서는 의식의 흐름대로 무작정 쏟아내는 데에 집중했다면, 2단계에서는 구상을 마치고 글을 쓰려고 애썼다. 구상은 한 편의 글에 무엇을 담을지 계획하는 것이다. 영감이나 글감을 어떻게 시작하고 풀어나갈지, 어떠한 마음을-사유를-담아낼지 간략하게 적어두었다. 뼈대를 세워 놓아도 쓰다 보면 샛길로 샐 때가 많았다. 정신을 차리고 적어 놓은 걸 참고해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길 반복했다.
글쓰기 근력이 붙으면 전하고 싶은 말과 더하고 싶은 이야기가 늘어난다. 샛길로 새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면서 글의 분량도 점점 늘어났다. A4 한 장 반을 채우려고 했는데 3장에서 많게는 4장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이럴 땐 글에 붙은 군더더기 문장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A4 한 장 반으로 분량을 줄여나가는 작업을 했다. A4 한 장 반 분량을 정해 놓은 이유는 읽는 사람도 부담되지 않고 한 편의 글에 서사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길이감이라고 생각해서이다. 많은 글쓰기 수업에서 A4 한 장 반 분량을 추천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분량을 줄여나갈 땐 구상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문장에 중점을 두었다. 다시 말해 샛길로 샌 이야기인데 문단을 통으로 삭제하기도 했다. 이것 역시 반복하다 보니 샛길로 새는 상황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1단계에서 글을 쓸 때 울지 않았던 날보다 운 날이 더 많았다. 매일 글을 쓰면서 주 6일은 울고 하루는 울지 않았던 듯하다. 그만큼 감정을 양껏 쏟아내었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결혼 전까지 의지대로 삶을 살지 못해 마음에 쌓인 게 많아서인지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나날이었다.
내상이 깊어 트라우마로 남은 경험은 수십 번에서 백 번 이상을 쓰기도 했었다. 하나의 장면을 글로 수없이 마주하며 울음도 점점 줄어갔다. 어느 날부터 울지 않고 트라우마로 남은 장면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로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수십 번, 백 번 이상 쓴 몇 편의 글이 2022년 8월 12일 《외로움을 마주하는 자세》라는 책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더는 같은 장면을 글로 쓰지 않게 되었다. 글 쓰는 형태도 달라졌다. 아픔을 글에 담에 출간한 건 나아가는 글쓰기의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사실 글에 담긴 감정을 덜어내는 일은 글쓰기에 숙련된 사람이 아닌 이상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정이 과잉된 글을 쓰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감정의 절제가 안 된 글은 독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글의 어느 부분에 감정이 과잉되었는지 알려면 글과 거리두기를 잘해야 한다. 글과 멀어지려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간 묵혀야 한다.
오늘 글을 쓰며 울었다면 파일로 저장해 놓았다가 며칠 뒤에 다시 읽는다. 감정이 다시 올라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아니라 눈물이 줄줄 난다면 객관화가 덜 된 것이다. 글을 더 묵힐 필요가 있다. 시간이 지난 다음 글을 꺼내어 보았을 때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타인의 시선으로- 보인다면 본격적인 퇴고를 시작한다. 퇴고는 글을 여러 번 수정하는 과정이다.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헤밍웨이는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다. 모든 초고가 쓰레기는 아니겠지만, 당장 휴지통에 버려야 할 정도로 그만큼 볼품없다는 뜻이다. 초고를 쓸만한 글로 만들려면 퇴고를 거듭해야 한다.
글은 퇴고할수록 좋아진다. 처음엔 이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아무리 고쳐도 글이 좋아지는 걸 감각할 수 없어서였다. 그 당시의 나에게 퇴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퇴고를 할 수 있는 능력도 글쓰기처럼 하면 할수록 실력을 갖출 수 있다는 걸 알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미친 퇴고를 했던 건 공모전에 에세이와 소설을 응모하기 위해서였다. 에세이를 50번 이상을, 소설을 76번에 걸쳐 퇴고했다. 소설 합평회에서 너무 많은 퇴고로 인해 빈틈이 없는 게 문제라고 했다. 쉽게 말해 독자가 문장을 읽고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에서 여백을 느끼고 독자가 이야기 너머를 상상해야 하는데 모든 걸 다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설 합평회를 이끌어 주시던 K 작가님께서는 너무 많은 퇴고는 되려 글을 좋지 않게 할 때가 있다고 조언해 주셨다.
에세이는 사실 그대로를 쓰면 되어서 구체적일수록 좋다. 문제는 과도한 퇴고로 인해 나만이 가진 색깔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10회를 넘기는 퇴고는 멈출 수 없었다. 어디서 그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20회 미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다. 합평회에서 받은 피드백으로 몹시 속이 상했지만,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퇴고 능력은 스스로 알아차릴 만큼 빠르게 향상되었다. 퇴고를 어느 선에서 멈추는 게 적절한지도 감각할 수 있었다. 초고마다 퇴고해야 하는 횟수는 제각각이지만 지금은 한 편의 에세이를 평균 3회에서 많게는 5회를 하는 편이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200번 이상 퇴고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미친 퇴고의 끝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걸 보면 퇴고도 저마다의 실력에 따라 누군가는 10여 번을, 누군가는 100여 번을, 누군가는 그 이상을 할수록 글이 좋아지는 듯하다. 퇴고를 50번 이상했을 때 글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건 나의 퇴고 실력이 거기까지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느 작가님께서는 글쓰기 토크에서 에세이를 2회 이상 퇴고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초고의 완성도가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동료 중 많은 작가가 퇴고는 끝이 없다며 퇴고의 고통을 토로하곤 한다. 끝없는 퇴고.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 멈추어야 할까. 무책임한 말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또한 감을 알아야 한다. 퇴고를 하다 보면 이제 되었다는 감이 드는데 비로소 그제야 탈고할 수 있다. 정답이 없는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건 감각이다. 글쓰기에 자신을 수없이 담금질하며 감을 익혀 나가는 것이 쓰는 자의 자세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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